나의 인생 좌우명 / 이영복 장로 > 다비다칼럼

본문 바로가기

나의 인생 좌우명 / 이영복 장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kim 작성일21-08-18 14:13 조회6,088회 댓글0건

본문

나의 인생 좌우명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1. 젊은 날의 인생 좌우명

 

나의 젊은 날 인생 좌우명 중 하나는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을 살자!”였습니다. 여기서 멋이란 겉멋이 아닌 속멋을 가리킵니다. 산상수훈의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마5:13)의 맛에 가까운 의미로 썼습니다. 낭만(浪漫)은 어느 정도 환상적이며 정서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상태를 말하는데, 나는 신비(mystery)의 의미를 더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멋과 낭만의 연장선에서 창조를 강조했습니다. 창세기의 천지창조 장면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 “아, 하나님의 창조는 참 멋이 있고 낭만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들풀과 꽃, 나무, 동물, 사람 등 피조물 하나하나를 보면 그렇게 멋이 있을 수 없고 도저히 과학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질서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감동을 더해주는, 신비롭기까지 한 그 낭만에 대하여 우리는 감탄하게 됩니다.

학창시절에 친구들과 셋이서 포항 내연산 계곡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텐트를 치고 자다가 새벽에 잠이 깨어 텐트 밖으로 나왔는데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은 수많은 하늘의 별을 보며 경외심에 사로 잡혔던 것입니다. “빛이 수천 년을 가야 도달할 수 있는 만큼 멀고도 먼 별들이 손에 잡힐 듯 바로 저만치에 있다니!”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는 찬양이 마음속으로부터 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내 인생의 좌우명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멋과 낭만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창조’가 내 인생에도 부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이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날 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스스로 정의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니 나의 삶은 하나님의 창조처럼 사랑을 위한 창조여야 한다.”

 

2. 그런 삶을 살았는가

 

나는 좌우명을 실천하기 위해 창작활동, 이를테면 시를 쓰고 작곡을 하는 것을 취미로 삼았습니다.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을 살자는 좌우명에 잘 어울리는 취미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드는 것이 재미있고 좋았습니다.

심지어 힘든 군대생활을 할 때도 멋과 낭만을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군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창의적인 발상도 했습니다. 몇 년 전에 나와 같은 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던 분이 연락을 주셔서 만났는데, 나를 "한밤중에 초소마다 커피 배달해 주던 군종사병"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나는 교육행정병 일을 하면서 군종 일을 같이 했습니다. 낮에는 행정과에서 일을 하고 새벽과 주일에는 군대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전임 군종사병은 부대 사령부에서 군목이 없는 독립대대 군종사병의 경우 군종 일만 하도록 배려해주어 다른 일은 맡지 않았는데, 나는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주어진 일을 하면서 군종 일을 하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정 그렇다면 야간 보초근무는 빼주겠다고 해서, 나는 밤마다 한 두 시간씩 보온병에 가득 믹스 커피를 타서 종이컵을 들고 초소를 돌며 병사들에게 커피를 따라주었습니다. 그런대로 멋과 낭만이 있고 창의적인(?) 군대생활이었지요?

어느 기독교 신앙서적에서 읽은 예화가 생각납니다. 전방에서 한 신참 병사가 밤에 보초를 서다가 "아버지! 아버지!" 소리 높여 울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윗사람이 순찰 중에 그 병사를 보고 병사 아버지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줄 알고 특별휴가를 보내줘서 집에 다녀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군종사병인데도 그 병사와는 달리 기도보다는 커피 배달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하하. 그런데 거의 40년이 지났는데도 내게 연락을 해온 그 사람이 나를 '커피배달 군종사병'으로 기억해줘서 참 감사했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설교 잘하는 군종사병'으로 불렸으면 더 좋겠지만 그 사람은 당시에 군인교회에 나오지 않았으니 그렇게 불러 줄 수는 없으니까요. 자신이 제대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나니, 군인 시절의 추운 밤에 따스한 커피 한 잔 건네주던 군종사병이 생각나서 수소문해서 나를 찾았답니다.

 

그런데도 누군가 나에게 그간 살아오면서 실제로 그런 좌우명에 충실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랬다고 자신에게 답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창조적인 삶이란 무엇을 처음으로 만드는 것, 창작 그 자체보다도 천지를 창조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창조주를 사랑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는 데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하여, 진정한 창조는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로 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낙제라도 면할 수나 있을까 염려가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도 재작년에 친구가 보내준 격려 문자를 받고 적이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2019년에 낸 책, <숨으로 쓴 연가>를 읽은 카톨릭 신자인 고등학교 동기생이 카톡으로 보내온 문자입니다. “영복아, 네가 전도한 중국 청년에게 '永生之路馥遠天晴(영생지로복원천청)'이라는 멋진 글귀가 적힌 족자를 받다니 멋있다. 너야말로 참 부러운 ‘관상적 활동가(觀想的 活動家)’다. 일하면서 관상하고 관상하면서 일하는 하나님 매니아(mania)”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자주 들린 베다니 마을에 살았던 마르다와 마리아라는 자매가 등장합니다. 두 자매는 예수님을 참 좋아했는데 표현하는 자세가 서로 달랐지요. 언니 마르다가 ‘이성의 추론에 근거한 합리적인 활동가의 영성’을 가졌다면, 동생 마리아는 ‘마음의 사랑에 근거한 직관적인 묵상주의 영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영성이 조화를 이룰 때 ‘관상적 활동가’로 불릴 수 있으니 친구의 나에 대한 평가는 쑥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칭찬이지요.

실제로 내가 좌우명에 따라 일상을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배운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 그분을 바라보는 관상 또는 관조(contemplation) 없이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은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친구의 평가는 60대 중반의 나이에 젊은 시절 내 인생의 좌우명을 다시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3.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는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의 모델을 시편 23편을 쓴 다윗에게서 발견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로 시작하는 시편 23편은 평화롭고 목가적인 장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다윗의 많은 시가 그러하듯이 그가 처한 현장은 광야였습니다. 풀도 없고 물도 없고 두려움이 엄습하는 광야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새길을 여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식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감동을 노래한 다윗이 누린 그 멋과 낭만,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삶 가운데 창조해주신 스토리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참으로 힘든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나의 좌우명에 담은 멋, 낭만이란 단어가 왠지 사치스럽고 경제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창조보다는 파괴가 연상되는 시대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의 좌우명은 역설적(逆說的)으로 코로나 시대를 극복하는 좋은 처방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멋과 낭만은 겉보다는 속에서 진가를 드러내고 광야에서 길을 찾고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서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에 오히려 역경을 거슬러 인생을 빛나게 하는 삶의 지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광야는 이미 에덴동산입니다.

 

그래서 나는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을 살자!”라며 20대의 젊은 시절에 자신감을 가지고 힘차게 종이에 썼던 좌우명을 겸허히 마음판에 다시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래, 나는 이제 60대 청년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을 살자. 더욱 사랑하며 살자.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라고 다짐하면서 말입니다.

전염병으로 혼돈과 어둠, 그리고 염려가 가득한 온 세상 위에 하나님의 새 창조와 사랑의 기운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전화:02-909-6613 팩스:02-941-6612
다비다 주소:서울 성북 동소문로 54,대아빌딩3층
대표:김혜란,개인정보관리책임자:김혜란

상단으로
PC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