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corona)에서 화관(花冠)으로 /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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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0-03-06 15:08 조회7,96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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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corona)에서 화관(花冠)으로
이영복(본회 사무국장)
아빠, 내 손 꼭 잡아줘요
큰아이가 어렸을 때 침대에서 뛰다가 모서리에 부딪쳐 눈과 눈썹 사이가 찢어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마침 주일이라 교회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기에 붕대로 지혈을 하고 얼른 가까운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의사는 상처가 깊다며 당장 꿰매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취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의사가 든 바늘을 보고 겁에 질린 아이가 말했습니다. “아빠, 내 손 꼭 잡아줘요.” 두 손을 포개어 아이의 작은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당시에 자주 부르던 찬송이 생각났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기도하듯이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주님여 이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놀랍게도 아이는 고통스런 과정을 잘 견뎌냈습니다.
그로부터 30여년도 더 지난 요즘, ‘코로나19’가 대구 경북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온 나라가 참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위험하고 두려운 상황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당분간 각종 모임은 물론 주일 예배까지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당시 불렀던 그 찬송이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눈가의 상처를 꿰맨 아이를 데리고 좀 늦었지만 교회로 달려갔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참으로 이 땅에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주님의 손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안아주심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업어주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의 행로가 끝나기까지, 아들의 손을 잡는 것에 더하여 아들을 안는 것 같이 그들을 안아주셨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명기 1:31) 광야 같은 우리의 인생 여정 가운데 안아주시는 그분의 품을 경험하기 소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태어나면서부터 백발이 되기까지 안아주고 업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이사야 46:3~4)
위로자, 파라클레토스
엄중한 위기 상황을 진정시키고 상처를 치유해줄 진정한 위로자가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요한복음을 묵상하는데 14장 16절에 등장하는 ‘보혜사(保惠師)’라는 단어가 제게 조용히 말을 걸어 왔습니다. 보혜사의 헬라어 원어,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라는 단어의 문자적인 뜻 그대로 곁에서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보혜사는 중국 성경에서 성령을 표현한 ‘파라클레토스’를 음역(音譯)한 것을 한글 성경에서 가져온 것이라 합니다. 소리를 따라 한자를 골라 번역한 것일 뿐, 그 한자 단어 자체로서의 의미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지요.
여담이지만, 오래 전 직장에서 홍콩 주재원으로 근무하기 전 베이징에서 중국어를 배우면서 영어 단어를 중국어로 음역하는 솜씨에 감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코카콜라(Cocacola)를 ‘可口可樂’이라고 씁니다. 가히 입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 한자의 우리 발음은 ‘가구가락’이지만 중국어 발음으로는 코카콜라에 상당이 가깝습니다. 프랑스는 부처나 난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나라인데도 ‘佛蘭西(불란서)’라고 씁니다. 마찬가지로 ‘보혜사’는 지킬 보(保), 은혜 혜(惠), 스승 사(師)’의 뜻이 아닌 발음을 차용한 것이지요.
보혜사에 대해 조용히 묵상하려는데 이를 방해라도 하려는 듯이 잡음이 마음의 귓전을 울렸습니다. 대구 경북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되어 우리나라의 확진자가 5,000명을 훌쩍 넘어서는 데 촉매역할을 한 신천지의 교주가 떠오른 것입니다. 그 사이비 종교단체에서는 ‘보혜사(保惠師)’를 '은혜로 보호하는 스승'으로 왜곡 해석하고 교주를 ‘보혜사’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기왕에 알고 있기에 연상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보혜사이신 성령님께서 코로나19를 통해 교주가 가짜 보혜사라는 것을 드러내고 주님의 몸이신 교회를 혼탁케 하는 어둠의 영을 제하여 정화하시리라 믿습니다.
잠깐의 잡음이 지나가고 요한복음 14장을 묵상하며 저는 참된 위로자이신 성령님을 만났습니다. 파라클레토스는 변호사, 협조자, 대언자, 중재자, 보호자, 상담자, 위로자 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위로자’로서 다가오신 것입니다. 실제로 KJV 등 영어성경에서는 파라클레토스를 Comforter(위로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의 “내가 떠나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 전후의 말씀에는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가시며 제자들을 위로하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음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절),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들어주겠다.”(13절) "나를 사랑하면 나를 나타낼 것이다."(21절), “또 다른 보혜사가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내가 한 말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26절), “내가 평안을 주고 간다. 두려워 말라”(27절)는 말씀 등등은 그 어떤 모습보다도 위로자의 모습을 느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마치 세상을 떠나는 아버지가 걱정 많은 자식을 향해 유언을 하고 위로를 할 때 할 수 있는 그런 뉘앙스가 담긴 말씀들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아버지가 결코 줄 수 없는 구원의 비밀을 통한 위로의 능력을 베푸신 것이었지요. 그리고 위로의 절정에서 세족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세족식은 섬김이라는 육적인 의미를 넘어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해 영생으로 가는 영적인 의미를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한 가장 아름다운 위로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위로자를 영어로는 ‘Comforter’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힘으로 함께하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셨다며 우리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위로(요 16:33), 또 다른 보혜사로서의 성령님의 위로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감당할 힘, 이길 힘을 넉넉히 주십니다.
속히 고쳐주소서
코로나는 바이러스 모양이 왕관을 닮았다고 해서 왕관을 뜻하는 ‘corona(코로나)’로 이름 지어졌다고 하지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위로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코로나, 곧 슬픔의 재가 화관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라는 이사야 61:3 말씀의 ‘시온에서’를 ‘우한에서’, ‘중국에서’, ‘대구 경북’에서 ‘한국에서’ 등으로 바꿔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며 기도합니다.
최근에 유튜브에서 감동적인 동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도시는 봉쇄되었어도 사랑을 봉쇄하지 말자.(封城不封愛)”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영상입니다. 코로나19로 봉쇄되어 잿빛 도시가 된 중국 우한에서 노란 방호복을 입고 시민들에게 마스크를 나눠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집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 함에도 위험을 감수하며 시민들의 회색빛 마음을 치유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그들이야말로 재를 화관으로 바꾸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상의 마지막 부분 자막이 고난과 환난 중에서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었습니다. “참 평안은 풍랑 속에서 더욱 진귀함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군대는 환난 속에서 남다르게 보입니다.”
26년 전 다비다자매회가 시작될 무렵 하나님께서 소명처럼 주신 말씀이 고린도후서 1장 4절 말씀이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곧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겐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할 소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어려운 시기야말로 다비다자매들이 그때부터 받은 소명을 실천할 때입니다. 말씀으로 격려하고 기도로 중보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위로자가 되십시다.
코로나19로 서로 안아주기는커녕 손을 잡아주는 것도 금기가 된 상황에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업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립니다.
“주님, 코로나19 전염병으로부터 이 땅을 속히 고쳐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