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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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7-06-16 16:34 조회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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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정근두 목사(다비다자매회 이사장 역임, 울산교회 담임 )
누가복음 19장에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 놀랍게도 자기의 재산의 반을 내어 놓았는데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희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내어놓았습니다. 삭개오처럼 영광의 주님을 영접한 자의 눈은 가난한 이웃을 발견합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언제나 나보다 잘사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옵니다. 중고차를 몰고 교회에 올 때 걸어오는 교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신보다 좋은 차를 몰고 오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는 눈은 영성의 척도입니다. 가난한 자를 보는 눈이 때로는 산 기도나 금식기도보다 더 좋은 척도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약1:27)
하나님 앞에서 정말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들은 이웃을, 특히 가난한 이웃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내 재산만 늘리려는 자들이 아닙니다.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끔찍이 사랑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자타가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보지 못하고 산다면 신앙생활의 기초를 재검토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이야기하는 경건한 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우리를 살펴봅시다. 세상의 이웃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 안에 형제라 불리는 사람 중 물질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을 때 오늘 교회가 얼마나 그 아픔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교회 건축도 선교사 파송도 다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들이 스스로 세운 목표가 우선시되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저버린다면 이는 현대판 ‘고르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현장의 아픔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은 순천에 있는 어떤 사모님으로부터 연락이 온 적이 있습니다. 그분 남편은 미자립 교회에서 목회하시면서 택시를 운전하셨는데, 그만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목사님이 돌아가신 후 그동안 후원하던 교회와 후원자들이 후원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지 않고 더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사모님은 늘 우리 교회에 한번 와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같은 시찰회에서 놀러 다녔던 목사님들이 갑자기 타인처럼 다 돌아설 때 계속 도움을 준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주는 후원금이 그들 수입의 전부였기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답니다. 우유 하나로 두 아이를 먹일 수가 없어서 물을 타서 먹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것밖에는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농담처럼 그때 엄마는 나쁜 엄마였다고 한답니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몬1:7) 이것은 교회 공동체를 향한 형제들의 찬사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찬사를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혹 여러분의 그 악착스럽고 매정한 삶의 자세 때문에 오히려 형제들의 탄식이 늘어나지는 않습니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괄시받던 사람이 안식처를 찾아 교회에 나옵니다. 그런데 교회 역시 잘 사는 사람들이 우대받고 가난한 사람들이 천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교회로부터 발을 돌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닫고 만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을 섬기고 싶은 거룩한 소원의 불을 가슴에 담읍시다.
* 이 글은 정근두 목사의 저서 <삭개오, 그에게로 오신 예수님>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