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옷자락에 쓴 일기 / 이영복 > 좋은글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좋은글

  

아버지의 옷자락에 쓴 일기 / 이영복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하늘꽃향기 작성일11-09-30 15:25 조회736회 댓글0건

본문

                                                                      이영복(다비다자매회 이사장)

□ 2011. 8. 24.(수)

아버지께서 아침에 의식을 놓으셨다는 어머니의 전화. 경북대병원 응급실이 사무실 바로 건너편이라 금방 달려갈 수 있었다. CT 촬영 결과 우려되던 뇌졸증은 아니라기에 적이 안심이 되었지만 그것도 잠시. 혈압이 50이하에서 머물고 의식이 전혀 없는 상황이 수십 분이나 지속되었다. 담당 의사는 돌아가실 가능성이 한 40% 정도는 되는 위기 상황이니 최선을 다하겠지만 마음의 준비도 하라고 하셨다. 급성폐렴에 의한 쇼크. 마지막 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이대로 이별인가?

수술실에서 의사들이 어두운 얼굴로 응급조치를 하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 때 느끼던 시간은 더 이상 시계바늘로 설명되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었다. 감사하게도 그 낮았던 혈압이 안정 상태를 찾았다. 첫 고비는 일단 넘긴 것이다. 병상이 수술실에서 응급실로 옮겨졌다. 간호사는 옷을 환자복으로 갈아 입혀야 한다며 인공호흡기를 하고 계신 아버지의 남방셔츠를 잘라도 되겠는지 물었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문득 몇 달 전 계단에서 넘어진 후로 기력이 많이 쇠하신 아버지께 이달 초에 성경구절 한 절(이사야 41장 10절)을 써 달라고 부탁한 기억이 떠올랐다. 담대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마음에서였다. 아버지는 계단에서 넘어지며 바닥에 손을 짚다가 어깨가 탈골이 되고 인대가 끊어져 글씨를 제대로 못 쓴다며 거절하셨지만 다음 주에 만났을 때 성경구절을 쓴 메모지를 건네주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간직하고 자주 묵상하시라고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가위로 셔츠의 팔 부분을 자르고 있던 간호사에게 “잠깐!”이라 외치고 셔츠 윗주머니를 뒤져보았다. 한 자 한 자 아버지의 정성이 담긴 바로 그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이 내 영혼의 귓전을 울렸다.“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저녁 9시가 다 되어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내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의식은 없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참 평안해 보였다. 마치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부친의 영혼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믿음이 생겼다. 깨어나시면 말할 것도 없고 설령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데려가신다 해도 감사할 일인 만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다.

올 봄부터 아버지가 사시는 고향 대구에서 근무하게 되어 1주일에 하루는 어머니께서 만든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같이 TV로 프로야구 경기도 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아들로서는 감사할 일이었고 축복이었다. 서로 자주 얼굴을 대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에 대해 가슴 저리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2011.8.29.(월)

닷새가 지났어도 아버지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한 달 전에 똑 같은 폐렴으로 입원한 같은 직장 동료의 부친은 사흘 만에 깨어나셨다고 하는데... 짧은 글 한 구절이 생각났다.“우리는 모태에서 10개월, 이 세상에서 ( )년, 그리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 존재입니다”이 세상에서의 날 수가 미지수라는 점은 우리에게 남은 날을 계수하는 지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우리를 늘 겸허하게 한다. 아버지의 세 번째 영원한 삶을 위해 ( ) 속에 어쩌면 이제 곧 80이란 숫자를 써 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그리스도인은 2단계의 삶과 3단계의 삶을 통합하는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고 그러기에 2단계 숫자의 많고 적음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는 요한복음 17장 3절이나‘내 영혼이 은총 입어’로 시작하는 찬송가의“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후렴가사가 그 비밀의 답을 알려준다.

아버지의 귀 가까이 다가가 조용히 찬송을 불렀다. 할 수만 있다면 한 번 더 기적을 베푸셔서 의식을 찾고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10년 전에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는 부친을 대신하여 다시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했다. 80이든 90이든 영원이라는 영생의 기간에 비하면 동일하게 지극히 작은 수이고 아버지를 기쁘게 천국으로 보내드릴 마음의 준비도 어느 정도 끝낸 상태이지만, 10년 전이나 이제나 더 나누고 싶은 못다 한 이야기와 사랑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방학이 끝나가는 아이에게 잔뜩 밀려있는 숙제처럼 말이다.

□ 2011.8.30.(화)

내 인생에서 경험한 또 하나의 기적. 경북대학교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있는 여동생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버지께서 의식을 회복하고 깨어나신 것이다. 쇼크의 원인이 되었던 폐렴도 호전되고 엿새 동안 의존하던 인공호흡기도 제거되었다. 아버지께 내가 누군지 아시느냐고 물었다. “영복이지...”아버지의 손을 잡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완쾌하기 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걸리고 또 혹시 어떤 고비가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아버지에게 베푸신 은혜임이 분명하다. 아버지와 못다 한 이야기와 사랑을 더 많이 나눌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의식이 돌아온 아버지가 하신 첫 말씀은 신발이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같이 집으로 가자며 신발을 가져오라고 했다. 천국의 집으로 가는 신발은 항상 준비되어 있기에 따로 찾으실 필요도, 잃어버릴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만 이 세상에서 신을 신발 또한 가까운 곳에 두고 잃어버리기 싫으신가 보다.

무덥기로 유명한 고향, 대구의 여름도 어느새 끝자락에 와 있다. 아버지가 퇴원하시면 입고 신으실 수 있도록 새 남방셔츠와 새 신발을 사드려야겠다. 그리고 올 가을엔 아버지 어머니 모시고 단풍 여행이라도 한 번 다녀와야겠다. 아버지께서 쓰신 이사야서 41장 10절 그 메모지는 아주 특별한 메모지가 될 것 같다. 그냥 메모지에 붓으로 쓴 글이라기보다는 왠지 아버지의 찢겨진 옷자락에 하나님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써주신 글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상단으로

다비다 사무실 주소:서울 성북구 동소문로 54, 대아빌딩3층
전화:02-909-6613 팩스:02-941-6612 다음까페(싱글맘 동산) COPYRIGHT(C) BY www.dabidasisters.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