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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아도 너무 닮은 울 아이 / 김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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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1-10-14 11:43 조회15,7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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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아도 너무 닮은 울 아이

 

 

김영경

 

조용한 방에 있는데 여러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목욕 중에도 소리가 계속 들렸습니다. 갑자기 연막탄 터진 냄새가 나더니 환풍기에서 연기가 끝없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 벗은 채로 거실로 나왔습니다. 거실은 연기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옷을 입고 밖에 나가 할머니를 기다렸습니다. 공원으로 모시고 가서 조용히 말했습니다. “할머니!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해요.” 할머니와 함께 한양대 정신과에 갔습니다. 저를 진찰한 의사 선생님은 그 소리, 그 연기, 그 냄새. 모두 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설명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과학적으로 생각하세요.” 의사 선생님의 말이었습니다. 1991년 저의 나이 22살 때 뜻하지 않은 질병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양극성 정동장애’라는 조현병에 걸린 것입니다.

저는 더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토록 성실히 살았는데, 악착같이 살았는데 이 모든 것이 허상이고 환각의 삶이라니?” 할머니는 처녀를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병원을 나와 한약을 지어 주셨습니다. 여러 곳을 알아본 후 대한기도원에서 요양을 하게 했습니다. 요행히 한 달이 지난 후 저는 안정을 찾아 퇴원을 했습니다.

 

얼마 후 보험 아줌마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안정을 위한 결혼이었는데 남편은 거짓된 부분이 많았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후 알게 되어 실망감이 컸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복잡한 힘든 여건 속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로 신혼생활을 했습니다. 첫아이가 태어난 후 빚을 얻어 음악학원을 인수하여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네 살 터울로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아이들 육아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남편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여 아이들 양육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2000년에 이혼을 하고, 3살, 7살 두 딸을 데리고 싱글맘이 됐습니다. 그 당시 저는 조현병이 다시 발병하여 치료 중이었습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 많은 빚을 지고 제게 이혼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저는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로 두 딸의 친권자가 됐습니다. 제 나이 31살이었습니다.

 

얼마 후 병이 다시 호전되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지자 가사 도우미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제가 일하는 동안 돌봐 줄 데도 필요하고 공부도 많이 시키고 싶어 많은 학원에 보냈습니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저의 헌신 속에 아이들이 커가고 그와 동시에 저의 어린 시절 못 받은 양육을 아이들에게 쏟음으로써 제게도 치유가 되었습니다. 저는 늘 아이들에게 “오늘 많이 사랑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라고 말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저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족하고 감사하는 삶이었습니다.

 

제가 조현병을 처음 앓은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저의 담당 의사선생님은 저의 오랜 고질적인 질병이 지금의 상태로까지 좋아진 것에 대해 기적이라고 말씀해주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간직한 저의 평생의 꿈은 책을 출간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예 <작은 나귀>라는 책 제목도 정해 두었습니다. 수시로 글을 써서 차곡차곡 모아두었습니다. 어느 날 극동방송 라디오를 듣다가 싱글맘을 돕는 단체인 다비다자매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 2014년부터 모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혼자 아이들을 돌보면서 병치레를 하며 외롭게 살던 저에게 다비다자매회는 맑은 생명의 샘이었습니다. 정기모임에서의 신선한 강의와 예배는 영적으로 저를 키워주는 거름이었습니다. 여건상 여행 한번 가지 못하는 저에게 다비다 캠프는 큰 위로와 쉼, 힐링의 시간이었습니다. 자매님들과의 교제는 갈수록 친밀감을 더해 어느새 가족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 속에서 인도하심을 받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처음 모임에 갔을 때 회장님이신 김혜란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꿈이 있습니까?”라고. 저는 바로 대답을 했습니다. “네, 책을 내는 것입니다.”라고.

 

그로부터 2년 후 김 목사님이 ‘도서출판 다비다’ 편집장님과 함께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꿈을 기억하고 있다가 “영경씨 지금도 책을 낼 생각 있으세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즉답을 했습니다. “네, 이미 글들을 많이 써 놓았어요.”하며 모아둔 글들을 보여드렸습니다. 글을 훑어본 김 목사님은 ‘도서출판 다비다’ 출판사를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 책으로 저의 책을 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낸 <작은 나귀>는 저를 고질적인 질병으로부터 구하는 비책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처방보다도 효과가 컸습니다.

제가 책을 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의사 선생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많이 좋아졌지만 그건 과대망상입니다.” 의학적으로는 바른 조언이었지만 책을 내려던 저를 좌절케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김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책 내는 것을 포기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김 목사님은 좀 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습니다. 이상하게도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 새록새록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열어준 출판기념회에서 내가 쓴 책에 김영경이란 이름으로 사인을 해주는 자신의 모습이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슬프고 부끄러운 자신의 삶이 다비다자매회를 만나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이 닿고 책의 출간을 통해 치유가 완성되고 저는 회복됨을 느꼈습니다. 과거가 한꺼번에 정리가 된 듯했습니다. 저의 첫 책 출간은 50대의 나이에 사이버대학 ‘미디어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여 소설가의 꿈을 키우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또 다른 큰 꿈이 있습니다. 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도입니다. 다비다자매회에 나갈 무렵부터 저와 같은 조현병을 앓기 시작한 큰 딸아이가 제가 나았듯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의술로 소문난 병원들을 돌아다녔지만 쉽게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같은 병이 들었을 때 돌봄을 받지 못했지만, 딸아이는 제가 돌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이 조현병을 앓은 경험이 있으니 의사 선생님의 상담이나 약으로 안 되는 부분을 챙기며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닮아도 너무 닮은 울 아이’라 부담감보다는 이상하게도 친밀감이 큽니다. 물론 아무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큰 아이를 돌보는 데 힘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바로 지난달에 있었던 일입니다. 두 딸이 싸웠습니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큰 아이가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큰소리로 짜증을 내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살아야 해? 대학교 휴학하자고 했을 때 반대해서 병이 났어.” 학교에 다닐 때 휴학 안 한 것이 조현병의 원인이라고 저를 원망하는 것입니다. 작은 아이가 그 소리가 듣기 싫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큰 아이의 히스테리는 심해지고 둘이 요란하게 싸웠습니다. 저는 싸움을 말리느라 진땀을 뺐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한참 후 좀 진정이 됐을 때 현관문을 누군가 두드렸습니다. 경찰 3명이 출동했습니다. 이웃에서 신고한 것입니다. 순간 부끄럽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경찰을 본 아이들은 주눅이 들었는지 고분고분해졌습니다. 저는 이웃이 원망스러웠지만 한편으로 제가 못 말리는 싸움을 경찰이 나타나 막아 준 것에 위안이 되었습니다.

큰 아이는 온순하고 내성적이고 작은 아이는 씩씩하고 능동적입니다. 큰 아이가 전문대에 진학하고서 조현병이 발병하여 많은 세월을 환청과 망상으로 고생했습니다. 작은 아이는 조현병을 앓은 엄마와 앓고 있는 언니를 보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집안 내력인 민감한 유전적 요인으로 20대인 두 아이 모두 저의 손이 많이 가는 상황입니다. 세 식구가 하루하루를 조심스럽게 살고 있습니다.

 

큰 아이의 마음이 진정된 후 함께 냇가로 나갔습니다. 흐르는 물에 두 발을 담그고 손으로 물장난을 쳤습니다. 저는 큰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흘러가는 물은 그냥 흘러가게 하고 흘러오는 물에서 재미있게 놀자!”, “지난 과거를 붙잡고 자꾸 상기하지 말고 현재의 삶에 집중하자.” 아이도 동감을 했습니다. 저의 육아는 쉰이 넘어서까지 연장되었습니다. 두 딸이 안전하게 지내고 안정적인 상황에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꿈이요, 기도일 뿐 아니라 엄마로서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저를 닮아도 너무 닮은 우리 딸아이가 사랑스럽습니다.

 

* 사단법인 '희망과 동행'에서 다문화가정 및 한부모가정을 대상으로 공모한 제10회 2021 추석명절맞이 수기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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