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애야, 참 잘 살아왔다! / 박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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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1-12-03 12:00 조회15,2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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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애야, 참 잘 살아왔다!
박춘애
누구에게든 고난은 예고하지 않고 찾아온다지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남편이 ‘급성골수성백혈병’이라고 판정 받던 10년 전의 그날이... 남편과 저는 중국에서 태어나서 성장했고, 인연이 닿아 서로 만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증조할아버지께서는 독립운동가이신 구춘선 선생님이십니다. 1857년 함북 온성에서 태어나셔서 구한말 남대문 수문장을 하시다가 군복을 벗고 1899년에 만주로 이주하셨습니다. 1919년 용정에서 <대한독립신문>을 간행하셨고 대한독립기성총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셨습니다.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국민회로 개편하여 조직을 확대시켰습니다. 국민회에 군사부를 두고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봉오동 ·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하셨습니다. 그러하셨기에 올 광복절에 봉오동 ‧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 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봉환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묘지에서 영면하시게 되었다는 소식은 마치 증조할아버지를 가까이 모신 듯 하여 더더욱 반가웠습니다.
남편과 저는 1997년, 증조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귀화를 했습니다. 독립유공자 후손 3대까지는 한국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많이 받을 수 있는데 저희는 4대인 관계로 다른 혜택은 없이 그냥 귀화만 가능했습니다. 귀화 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아들 3형제를 낳았습니다.
낯선 땅 한국에서의 생활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첫째 아이를 임신하였을 때 일입니다. 남편이 일하던 용접회사 사장님이 남편이 중국에서 온 것을 알고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성품이 착해서 사장님이 한꺼번에 밀린 월급을 입금해준다는 말만 믿고 5개월 동안 한 달에 20~30만원씩만 받으면서 일했습니다. 제가 산후준비를 해야 해서 돈이 필요하다고 사장님에게 여러 번 전화를 했습니다. 그때마다 내일 입금할 테니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하고는 입금해주지 않았습니다. 거짓말만 하다가 나중에는 전화도 받지 않았고 급기야 본인 핸드폰번호까지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때 밀린 5개월 월급을 아직도 못 받았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그 사장님이 너무나도 원망스럽습니다.
그래도 세상에는 나쁜 사람보다 선한 사람들이 더 많아서 사는 맛이 납니다. 저희 가족은 교회에서 좋은 분들을 만나서 의정부에서 살다가 서울 동작구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려웠던 모든 환경도 동작구 다문화가정지원센터와 교회에 다니시던 지인 분들의 도움으로 잘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막내가 태어났을 때 저와 남편의 부모님들은 모두 중국에 계셔서 산후조리를 도울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동작구 다문화가정지원센터에서 산후도우미를 보내주셔서 산후조리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거제도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에 한 달에 한 번쯤 집에 왔습니다. 제가 혼자서 8살, 4살 아이 둘과 신생아를 돌보면서 산후조리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 산후도우미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 기회를 빌려 다시 한 번 동작구 다문화가정 지원센터의 따스한 배려에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제 인생의 가장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글 처음에 쓴 ‘예고 없이 찾아온 고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011년 7월, 남편은 감기증상으로 동네병원에서 한 달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출근한 남편이 저에게 갑자기 전화를 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호자가 빨리 오라는 병원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옆집에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고 황급히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하니 남편은 마스크를 쓰고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조금 후에 의사선생님이 저에게 조용히 다가와서 혈액검사 결과 ‘급성골수성 백혈병’이라는 판정이 나왔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보통은 골수검사에서만 나오는 수치가 혈액에서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처음에 급성골수성 백혈병이 무슨 병인지도 몰랐습니다. 나중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혈액암이었습니다. 저는 담당 의사 선생님께 생명에 지장이 없느냐고 물어 봤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3개월이 고비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3개월 동안 잘 치료를 받으면 회복이 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3개월밖에 살 수 없다는 의미였다는 것을 남편이 치료를 받다가 2개월 반 만에 세상을 떠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밤낮으로 남편을 간호하면서 하나님께 남편을 살려 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 모든 상황들이 꿈인 것처럼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병원비도 어마어마하게 나왔습니다. 남편의 병원비 모금을 위해 ‘지금은 라디오시대’ 방송에 사연을 보내고 인터뷰를 하고 방송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방송으로 사연이 소개되는 날에 남편은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사연 방송 중에 라디오 진행자가 남편의 죽음 소식을 전해 듣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저와 어린 삼형제만 세상에 남겨 놓고 무엇이 그렇게도 급했는지... 그때 아이들의 나이는 각각 11살, 7살, 3살이었습니다. 저의 형편을 잘 아시는 교회 목사님께서 남편의 병원비 마련을 위한 성도님들의 특별헌금을 모아 남편의 병원비와 장례식 비용에 보태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목사님과 교회 성도분들에게 거듭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남편의 죽음은 저에게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난은 예고 없이 올 뿐만 아니라, 왜 혼자 오지 않고 쌍으로 오는 것일까요?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 후 하루하루 어렵고 힘든 모든 상황을 감당하기도 벅찬 저에게 갑상선암이 온 것입니다. 담당 의사선생님은 저에게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함께 또 하나의 힘든 산을 넘어야 했습니다. 이번에도 교회에서 모든 수술비와 치료비를 내주셨습니다. 수술 당시 제 옆에 간호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동작구 다문화가정지원센터에서 간병인 자원봉사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저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인생은 산 넘어 산이다.”는 어떤 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갑상선수술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또 다리골절수술과 연골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다리수술을 받은 저는 혼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기에 어린 아이들이 집안의 모든 일들을 배워서 저를 도와야 했습니다. 저는 입으로 말하고 아이들은 그 말대로 행동하며 저를 도왔습니다. 모든 것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병약한 홀몸으로 아들 셋을 키우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옵니다.
특히 남편이 세상을 떠난 그해 겨울, 생계를 위해 세 살인 막내아들을 데리고 청소일을 하던 때의 일이 자주 생각납니다. 제가 청소하는 동안 아이가 계단에 앉아서 졸다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던 것입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서 이마를 꿰매며 마음 조렸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쿵쿵 뛰는 것 같습니다. 둘째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 급기야 다른 아이 핸드폰을 훔쳐 집에 왔습니다. 정신이 나간 듯 아이 손을 잡아끌며 핸드폰 주인을 찾아가서 핸드폰을 돌려주었습니다. 부모님께 아이 교육을 잘못해서 죄송하다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하며 용서를 구했던 생각이 납니다. 큰아들은 인터넷 댓글 창에 친구가 재미있으니 해보라는 말을 듣고 장난으로 욕설 댓글을 달아 300만원을 내라는 소송장까지 받았습니다. 당시 다리수술로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경제력이 없던 형편에 느닷없이 300만원이라니,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소송장을 들고 있는 저의 손은 엄청 떨고 있었습니다. 동대문 구청에서 소개해준 변호사의 도움도 받고 불편한 몸으로 목발을 짚고 난생 처음 법정이란 곳을 가보았습니다. 오랜 조바심과 아들을 위한 눈물의 호소 끝에 다행히 합의금 50만원으로 문제 해결을 봤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살아오는 동안 힘들고 어려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맙고 기쁜 일도 많았습니다. 막내아들은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엄마 안아줘!"라는 말부터 시작합니다. 제가 미용실에서 머리를 많이 자르고 집에 왔는데 막내가 저를 보고 "엄마 너무 젊어 보인다."라고 하면서 "엄마라고 부르지 말고 누나라고 부를까?"하면서 애교를 떨기도 합니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기분 좋게 해주는 막내의 꿈은 경찰관이 되어서 엄마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년이면 벌써 중학생이 되는 그런 아이가 사랑스럽고 대견합니다.
둘째 아들은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으며 성격은 차분하고 우리 집에서 딸 같은 아들입니다. 설거지, 쌀 씻어 놓기, 집안청소 등으로 저를 제일 많이 도와줍니다. 컴퓨터를 잘 만지고 기계에 관심이 많아 초등학교 6학년 때 고장난 집 컴퓨터를 고쳐서 제 마음을 흐뭇하게 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관광고등학교 외식조리과에서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엄마를 위해 차려줄 멋진 식탁도 상상하게 해주어 자랑스럽습니다.
큰아들은 명랑하고 친구가 많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회장으로 당선되었던 일, 고등학교 다닐 때 성적 우수자로 선발되어 학교에서 무료로 보내준 대만 어학연수를 3주간 다녀왔던 일은 참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현재는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씩씩하게도 해병대에 자원입대하여 군복무 중에 있습니다. 말 안 듣는 동생들을 휘어잡던 큰아들의 입대가 당장은 좀 아쉽지만, 독립 운동가이셨던 고조할아버지의 DNA를 받아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힘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듬직한 아들입니다.
저는 10년간 감당하기 벅찬 고난의 기간을 보내며 “상처가 별이 된다.(scar into star)"는 서양 속담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제 휴대폰 대문 사진 아래에도 그렇게 써 놓았습니다. 실제로 제 인생의 상처들에게서 조금씩 빛이 나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수고와 노력보다는 저의 깊은 상처들이 오히려 별이 되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소외된 자를 돕는 공공기관과 제가 다니는 교회에 더하여, 제가 속한 한부모 자조모임인 다비다자매회와 다문화가정모임 가족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수기를 쓰면서, 힘들게 살아왔던 제 인생을 찬찬히 돌아보니 힘들고 아픈 일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감사할 일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춘애야, 참 잘 살아왔다!”고... 저를 그런 자리로 이끌어 주신 사단법인 ‘희망과 동행’의 수기 공모전에 감사드립니다. 글을 쓰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정말 행복했습니다.
* 사단법인 '희망과 동행'에서 다문화가정 및 한부모가정을 대상으로 공모한 제10회 2021 추석명절맞이 수기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