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사랑에 매혹되다 / 임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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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7-09-18 17:39 조회28,79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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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에 매혹되다
임동의(본회 후원자)
나는 40대 후반부터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나그네의 삶을 시작했다. 자녀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세태에 편승한 미국행이 아니라, 사랑하는 딸에게 갑자기 닥친 역경을 극복해 볼 돌파구로서 생각해 낸 길이었다. 이 땅의 어미들만이 끌 수 있는 집채만 한 이민가방에 먹을거리를 가득 담고 태평양을 건너며 눈물을 쏟아낸 세월이었다.
“하나님, 왜 저입니까?” 비행기 창밖,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것 같은 높은 창공을 쏘아보며 질문 공세를 퍼붓곤 했다. 참으로 외롭고 힘든 여정에서, 지나온 나의 삶을 평가받고 고통의 이유를 찾아내고자 했다. 당면하고 있는 어둡고 아픈 현상 너머에 실체이신 그분의 뜻을 알기 원했다. 칠흑 같은 혼돈의 한 가운데 서서, 내 영의 눈이 열려 사건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과 대면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가 쌓아온 경험과 문화가 입혀준 겉옷들, 그 누더기 옷들을 하나씩 벗어 던져야 했다. 보암직해서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었던 소중한 가치들을 포기해 버리는 단순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비본질적인 것에 생명을 걸고 살아왔던 내 육의 모습들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인본주의 옷을 잘 차려입고 성전을 드나들던 나의 겉사람과 세련되게 포장된 자아를 짐승처럼 묶어, 아침저녁 번제단에 올려놓았다. 징하디 징한 죄성으로 뼛속까지 퇴적된 교만과 탐욕의 불순물들이 태워져 한 줌의 재가 되길 간구했다. 그리고 급박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말씀 안에서 응답 받기를 갈망했다. 그래서 소가 여물을 입에 물고 온종일 우물거리듯 말씀의 낱알들이 고운 가루로 빻아질 때까지, 되새김질하며 참 양식만을 사모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품이 단순함(simplicity)과 정결함(purity)이라면, 이를 위해 어떤 훈련이라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주에 편만하게 드리워져 있는 주님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엄위한 심판을 이기시는 우리 주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소망했다.
그러던 중, 육십 세 되던 해 남편이 이스라엘 여행이라는 생일 선물을 안겨 주었다. 한국에서 오신 성도들과 동행한 외롭고 낯선 여정이었다. 출애굽 경로를 따라 금빛 현란한 이집트 문명을 관광한 후에,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광야로 진입했다. 푸른 빛 하나 없이 황량하고 삭막한 풍광만이 펼쳐지는 곳, 볼거리라곤 전혀 없는 황무지에서 다른 분들은 여독에 눈을 감았다. 나는 적막한 광야의 거대한 위엄에 압도되어 침묵하고 있었다.
“야아! 아름답다” 분명 내 입술을 통과한 감탄사였다. 이 때 어떤 힘이 내 존재를 들어 올려 광야 한 가운데 세워두는 듯 했다. 그 순간 깊숙한 내면에 숨어 있었던 내 영혼의 해묵은 일기장들이 빠르게 넘겨지며, 나의 속사람이 진솔한 고백을 터뜨린 것이다. "아! 나는 평생 애굽에 살면서 나와 자녀를 위한 국고성을 건축해 왔구나. 하잘 것 없는 지푸라기나 줍는 노예가 되어, 고기 가마 옆에서 바로가 공급하는 부추와 마늘을 영원히 즐기고자 했구나."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던 수많은 탐심들, 나만 챙기려 했던 이기적 욕구들이 고개를 쳐들며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젊은 날, 내가 머리가 되고자 열심히 그물을 던졌으나 그 노력이 허탕임을 알고 좌절하여 스올(지옥)에 살던 나를 땅이 입을 벌려 삼키려한 것이다.
"내가 구축해 온 허상들, 그 강력한 애굽의 힘이 나를 바로의 왕궁으로 끌고 다니며 불평과 억울함을 쏟아내게 했구나. 세상을 오감으로 바라본 열 정탐꾼처럼 아낙 자손들 앞에서 쫒고 두려워 나의 진정한 머리요, 거인이신 주님의 실체를 볼 수 없었구나. 아하! 내 안에 주님이 거하실 곳이 없었구나."
내가 착실하게 축척해 놓은 귀한 금으로 부어 만든 금송아지를 진노의 불로 태워버리시고, 나의 숨은 의도를 낱낱이 폭로시키려고 나에게 광야를 허락하신 것이다. 막강한 애굽의 세력에 사백 년 간 핍박받던 이스라엘이 내 안에서 고통 중에 울부짖는 소리에 나는 신음하며 울었다. 바로가 끝장이 나는 천둥소리와 함께 “다시는 애굽사람을 보지 않으리라.”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 그 선포에 울음을 마무리할 수 없었다.
"여호수아처럼 갈렙처럼 전심으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내 삶의 여정에 준비해 두신 42캠프(진영)에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로 진을 치며, 말씀을 잉태할 수 있는 약속의 땅까지 완주하고 싶습니다." 나도 모르게, 말씀에 순종하며 성령의 소욕으로 주는 자의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이 때 안내하는 분이 광야에 유일하게 심겨진 볼품없는 나무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 조각목(싯딤나무)은 물을 찾기 위해 땅 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어가기에, 광야에서 버틸 수 있고, 성막을 짓는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머리요 주인공이 되고자 안간힘을 쓰며 바동대며 살아온 나에게 주님은 나지막하게 그러나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말씀이 육화되어 오신 주님의 가장 큰 열망은 나와 영원히 살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검고(아1:5), 음행한 자였으나 아름답다고 불러주신 주님께서 아예 내 안에 집을 짓고 거주하시며, 나와 하나 되기를 갈망하신다는 것이다.
나의 말, 나의 하소연만을 늘어놓던 내가, 잠시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시는 주님의 불같은 사랑과 만난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 목적이 충족되기 전에는 울음을 뚝 그치지 않았던 고집불통의 성깔을 지니고 자랐다. 육십이 되어서야 나를 향하신 주님의 단 하나의 소망을 알고, 이스라엘 땅 밟는 곳마다 징징거리며 눈물을 뿌렸다.
힘든 사건들을 통해, 바위 같이 단단한 내 육질을 말씀이 뚫고 들어와 속사람의 두루마리에 아로새길 때마다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내 안에 침투해 있는 탐욕, 실패, 분노, 억울함으로 지은 집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와 산당의 본실인 내 옛 자아가 허물어지는 엄청난 진동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왕들과 족속들을 다 멸하시고, 말씀에 불순종하던 수많은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던 수 천 년 전의 사건들이 실시간 뉴스처럼 내 안에서 다시 벌어지길 기도했다.
나의 내면을 치수가 정확하면서도 아름다운 성막의 구조로 개조하라고, 그리고 새로운 인테리어들을 질서 있게 배치하라고 명령하신다. 매일 나를 번제물로 태워 올리며, 물로 씻어 정결케 하라 하신다. 온통 어둠뿐인 나에게 등불을 켜들고 찾아오신 주님께서 친히 말씀의 떡상을 차려주시고, 기도의 처소로 삼기 원하신다. 나의 속사람 깊은 곳에 광야의 조각목으로 작은 언약궤를 만들고 말씀을 담은 자의 겸손을 요구하시며 정금으로 입히시는 그 은혜의 하나님과 만나는 곳, 그곳이 광야다. 애굽에서처럼 내 눈을 만족케 하던 것들이 하나도 없으나, 참 만나이신 실체이신 우리 주님 한 분만으로 충만한 곳, 말씀(다바르)만이 들려지는 곳, 그곳이 광야(미드바르)다.
지금도 광대한 광야에서는 어둠이 빛을 품고, 죽음이 생명을 잉태해 내고 있다. 내 육체의 갈망과는 상관없이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경의 고통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애통으로 바꿔주시며, 사무엘이라는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 한나의 무릎으로부터 애끓는 간구를 받기 원하신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다 이루시기까지 결코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며 소망한다.(창28:15)
매달 다비다 회지를 받으면 나는 단숨에 읽어 내린다. 내가 여행했던 광야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받은 것처럼 가슴이 설레서다. 물을 찾으려하나 물이 없고, 길을 찾으려 하나 앞이 보이지 않는, 때로 죽을 것 같은 막막한 광야의 여정에서, 우리 자매님들이 온 몸으로 써내려간 글들이기 때문이다.
과녁 삼아 쏟아지는 진노의 화살 앞에서, 시퍼런 고난의 풀무 속에서도, 두렵지 않은 듯 거대하신 주님만을 바라보는 당당한 자매님들의 모습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지난 세월, 진통의 산실에서 힘겹게 <외발수레>를 끌며 엮어낸 사연들을, 오늘 사랑의 이야기로 바꾼 <사랑수레>는 주님이 주신 승리의 깃발이다. 신부와 결혼하러 오는 솔로몬 왕의 행렬 가마와 같은 이 사랑 수레에 탑승하신 다비다 자매님들은 주님의 기품 있는 신부들이시다. 자매님들은 더 이상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하지 않고, 허상의 세계인 겉사람을 떠나서, 오직 단순함과 순결함의 보석으로 단장한 여인들이시다. 고벨화(=대속) 송이이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몰약 향낭을 터뜨리시며, 거룩하신 몸으로 성전을 건축하신 후에, 순결하고 어여쁜 신부들을 얻으시고 “다 이루었다(칼라) 말씀하신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자가 누구인가?” (아8:5) 아버지시요, 남편이신 주님만을 신뢰하고, 오늘도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주님의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아름다운 여인들이시여! 킹덤의 왕이신 주님께 빼어난 노래를 올려드리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기도(중보)하는 의의 용사들이여! 이렇게 근본부터 다 회복된 다비다의 여인들이 주님의 사랑에 매혹되어 그분과 혼인한 신부의 영광을 누리시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