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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 안에서 / 한 에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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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8-04-16 16:48 조회27,1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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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암 안에서

                                                                         한 에스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장 2절 말씀이다. 혼돈, 공허, 깊은 흑암. 사별이란 것을 경험하기 이전의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던 단어들이다. 어려서부터 나름 참 많이 힘들었는데도 타고난 오기나 강단이 있었던 것 같다. 아프면 울고, 힘들면 힘들어했지만 그 어두움이 나를 잠식하기에는 나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좋았다.

남편과 사별을 하기 전, 남편과 결혼을 하고 몇 년이 지나면서부터 나는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을 맞닥뜨렸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한 결혼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나의 결혼생활은 후회와 원망이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과 사별을 한 그날, 내가 믿었던 모든 것들이 산산이 박살나 바닥에 흩어졌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는 하나님이 그를 고쳐주실 거라고, 그래서 젊은 날들의 고생을 웃으며 말하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죽었어? 그가? 진짜야?

아무리 힘든 일을 맞닥뜨려도 금세 회복하고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경우에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하나하나 지워가는 지적인 힘이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그것이 되지 않았다. 마치 나의 뇌도 박살이 난 것 같았다.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나는 피가 철철 흐르는 멍한 뇌 상태로 그저 그렇게 멍하니 시퍼런 날을 보냈다.

그를 보내고 첫 날은, 혼돈이라기보다는 공포였고 두려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그다지 무서운 게 없던 나에게 커다란 시련 속에서도 잠만은 잘 잤던 나에게 그를 잃은 첫 날 밤은 지극한 공포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와 있었던 일들... 내가 그를 살릴 수 있었을지 모르는 순간들과 병원에 갔던 것들, 한약을 먹고 투약을 하고 운동을 시키고, 위로한다고 했던 순간들이 두서없이 마음과 생각을 공격해왔다. 나는 살인자다! 어쩌면 아직 살아있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내가 죽였구나, 내가 보냈구나, 내가 놓쳤구나. 말 그대로 미칠 것만 같았다.

살면서 나는 거의 항상 나를 믿을 수가 있었다. 나름으로는 사랑이 많으셨던 부모님이셨지만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도 믿을 수가 없고 믿을 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의 판단과 나의 의지를 믿었다. 그리고 나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런데 정말 단 1%도 그 무엇도 믿을 수가 없다니. 그 끔찍한 현실 앞에 정신을 부여잡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마치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배드민턴 채를 휘두르는 분 같이 느껴졌다. 그 구멍 속으로 그가 떨어졌다. 하나님이 그를 놓치셨다. 이제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지극한 공포와 두려움의 밤을 지내고 이후의 폭력적인 장례 절차와 또 그 이후의 행정 작업 등등,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에는 참 많은 분주한 작업들이 필요했고 그 대부분은 제정신이 아닌 배우자가 해야 했다.

그 후에도 나는 열심히 살았다. 아들을 지켜야 했다. 자격증도 따고, 일도 하고, 교회예배도 빠지지 않았다. 기도하려고 했다. 말씀을 읽으려고 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완전하신 분이라고 찬양하며 잠시 울며 은혜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무력했다. 그 무기력은 점점 공허로 바뀌어 갔고 사별 후 2주기가 지나고는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예전의 나는 민감한 사람이었다. 잘 웃고, 잘 울고, 느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상처도 많지만 기쁨도 감사도 많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인생이라는 스케치북에는 이제 더 이상 점 하나도 찍을 이유가 없었다. 허무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지향점이 내 삶에는 항상 있었다. 그런데 그게 사라지고 더 이상 새롭게 세울 힘도 이유도 없으니 살아도 죽은 것이나 진 배 없었다.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나면 아마도 살 이유도 사라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중에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 전의 모습을 보았다. 그건 내 모습이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모습. 내가 보기엔 나의 삶은 나의 존재는 가장 폭력적인 모습으로 파괴되어 매캐한 먼지만 날리는 버려진 땅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창조 이전의 사랑스런 모습이었다. 그 분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나님의 손길이, 명령이 닿기 전의 그 모습. 나는 완벽하게 그 모습을 닮아 있었고 그 안에서 아주 오랜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에게 너를 내어주지 않겠니? 인간적인 모든 소망이 끝난 땅에 나는 오직 나의 명령으로 새 나라를 세우기 원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내 딸아, 일어나 함께 가자.

오랫동안 눈물도 멈추었던 그 곳에서 나는 울었다. 왜 우는지도 모르겠지만 엉엉 울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온전한 혼돈과 공허가 있음을, 깊고 깊은 매캐한 흑암이 나를 덮고 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그건 창조 전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너무 무섭습니다. 너무 아픕니다. 다시 설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행입니다. 제 삶은 여기에서 끝났습니다. 제가 앞으로 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바로 지금 이 곳에서 오직 당신의 뜻만을 이루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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