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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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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8-12-19 16:19 조회25,4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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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박선미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 또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지. 생각해 보면 살아온 지금까지 모든 일들이 녹록지 않았고, 희로애락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내게 가장 힘든 건 어머니로서 자녀를 키우며 겪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내겐 고등학교 1학년 아들과 중학교 2학년 딸이 있다. 딸은 나와 부딪쳐도 침묵으로 가볍게 반항하는 정도지만 아들은 다르다. 초등학교 때부터 거친 성정을 보였다. 나는 아들을 어릴 적부터 매를 들며 엄하게 키워왔다. 남편이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아빠 없는 자식이라는 세상의 평가에 내가 예민했었나 보다.

그렇지만 체벌의 효과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였다. 아들 녀석이 학교에서 괜한 일로도 친구들에게 폭력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혼을 내는 나 자신도, 묵묵히 비난의 화살을 맞고 있는 아이도 서로 지치고 힘든 하루하루였다.

때마침 친한 지인이 나의 고민을 듣고 체벌보다는 공감하는 대화로 교육 방침을 좀 바꾸어 보기를 권하였고, 나도 이번에는 제대로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대화법으로, 아이가 안정적인 정서로 커갈 수 있게 힘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아들에게 하루의 일과를 물어 듣기도 하고, 자기 전 머리맡에서 사랑의 기도로 아들이 사랑받고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주었다. 자식에 대한 어미의 애틋한 정성의 결실이었을까, 그 뒤부터 아들의 폭력성은 상당히 줄어들었고 그것만으로 나는 아들에 대한 염려를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자녀를 키워본 부모라면 다 공감할 것이다. 틀림없이 사랑하는 내 자녀이지만 그 시기의 아이는 마치 딴 세상에서 온 것처럼 이해하기 버거우며, 받아들이기 힘든 존재로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을.

별 탈 없이 지내던 아들은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는 차츰 거짓말을 하며 또 한 번 나를 당황케 하였다. 집에서 실컷 컴퓨터로 게임을 해놓고 시치미 떼고 안 했다고 우기다가 뜨끈뜨끈한 컴퓨터 본체에 손을 대게 하면 그제야 들통나 억울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아들의 비염을 위해 규칙적으로 먹어야 하는 약을 잘 먹었는지 물어보면 매번 먹었다고 대답하나 처방된 약의 개수를 확인하면 그대로인 것이다.

아들은 그렇게 금방 들통이 날 거짓말로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아직은 아들의 거짓말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적인 데 그친 것이 대부분이지만, 굳이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될 그런 사소한 거짓으로 은근히 속을 끓이게 하는 것이 더 문제이지 싶어 겁이 났다.

 

지난 추석연휴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아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갔다가 도서관으로 공부하러 갈 거라며 집을 나서기에, “웬일이래, 아들, 기특하네.” 하며 칭찬을 해주었다.

오후쯤 해서 마침 도서관에 반납할 책이 있어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도서관에 갈 거니까 만나서 같이 들어오자고 말했다.

그런데 아들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지금 공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니 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곤 지금 도서관 문을 닫는 중인 것 같다며 전화를 끊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들의 말에 서운해서 서둘러 운전하여 도서관에 갔다.

아뿔싸. 도서관 출입문에 ‘추석정기휴무’라고 크게 공고문이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어이없고 황망한 기분에 정문 앞에 우두망찰 서 있는데, 저 멀리 언덕 아래에서 도서관으로 허겁지겁 아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내 눈도 바로 보지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아이를 보니 한숨이 나오기보다는 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빤히 아이를 보고 있자니 6개월 전부터 배워오던 ‘비폭력대화’가 퍼뜩 생각이 났다. 딸 아이 학교에서 5주간 진행했던 ‘자녀와의 공감소통’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석을 하였는데 그때 배운 대화법으로, 인간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욕구가 숨겨져 있으며 서로의 욕구를 잘 읽어주는 대화가 비폭력대화다. 이 대화법으로 소통이 단절된 많은 가정들이 회복이 되는 사례가 많았고, 나도 관심이 많았기에 그동안 꾸준히 서울을 오가며 비폭력대화법을 배웠다. 그렇지만 정작 자녀와의 소통을 위해 배운 것을, 집에서는 아이들과 적용을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생각에 이르자 나는 금세 희망적이 되었고, 들뜬 마음으로 아들을 데리고 집에 와서 아이 앞에 그로그 카드(느낌, 욕구를 전달하는 대화식 카드)를 꺼냈다. 아들과 나는 그날의 상황에서 서로가 받았던 느낌과 욕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애잔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엄마는 우리 아들이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커 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했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아들은 대뜸 “엄마, 하얀 거짓말이라고 아세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의아해 하는 표정을 보이자 아들은 사뭇 진지하게 이야기하였다. 평소에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자신이 중학교 2학년 때 성적이 올라 장학금을 받았을 때 엄마가 무척 기뻐하던 모습이 생각이 나서, 종종 PC방에 가면서도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다고 했다는 거다. 혼자 고생하는 엄마가 안쓰럽고, 자기가 공부한다고 하면 엄마가 좋아하고 흐뭇해 하니 일부러 그런 거짓말을 했는데, 그것은 엄마를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고 엄마가 일상에 그런 행복감을 느끼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런 ‘하얀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들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나는 간간이 눈물이 나고 마음이 저려왔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는 타인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비폭력대화’에서 배운 소중한 메시지가 아들과 나의 맘속에 담겨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을 향한 그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조용히 내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하얀 거짓말을 해서라도 엄마가 잠시나마 행복하길 바라는 아들의 마음에 엄마가 감동을 받았고, 이제 그 마음을 알았으니 더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우리는 자정이 될 때까지 설령 그것이 선의의 ‘하얀 거짓말’일지라도 되도록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서로가 되자며 두 손을 맞잡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서로의 감정과 욕구를 나누는 진솔한 모자간의 대화를 통해, 서로를 더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앞으로 아들이 선한 거짓말을 하고 싶을 때마저도 그날의 대화를 떠 올리며 제 어미를 위해 용기를 내어 솔직해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처음으로 모자간에 긴 대화를 마치고, 멋쩍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의 이마에는 송송 여드름이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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