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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공사중, 하지만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 황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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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6-04-25 11:28 조회40,69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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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공사중, 하지만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황경희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엄격하고 예의를 중요시하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안 믿으셨고 어머니는 저만 6살 때부터 교회에 매주 보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그 당시에 이해가 안 되다. 사람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면 저한테 엄마 없다고 말하라고 시켰으며 예수쟁이들이 너무 싫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저한테 교회에 가서 착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라고 하고 성격이 좀 더 활발해졌으면 해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오빠와 저만을 위해 온 정성과 관심을 쏟아 부셨고 나중에는 치맛바람이 센 어머니로 변하셨습니다. 오빠는 워낙 공부를 잘하며 상장도 휩쓸고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며 어머니한테 인정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저는 마음이 무겁고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어머니의 관심을 사랑으로 못 느꼈고 언제나 아버지는 같이 사셨지만 가까이 계시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 마다 찾았던 분은 나의 친구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분은 나를 한 번도 혼내시지도 않으시고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두 팔을 벌리시면서 “이리와.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잖아. 내가 너를 너 모습 그대로 사랑하고 인정하잖아.” 라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해외발령이 나셔서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해외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부모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셨습니다. 오빠는 맹장이 복막염으로 되어서 거의 죽을 뻔했고 그 기회에 오빠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급성 천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서 일주일 동안 입원을 했습니다. 우리가 엄마의 전부였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도 있으니까 두려워서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오랫동안 앓고 있던 허리 디스크 병도 성령님을 통해 고침을 받으셨고 방언도 하고 성령체험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 어머니는 예수님을 뜨겁게 믿게 되셨고 아버지가 매우 가정적으로 변하셔서 같이 주말에는 교회도 가고 같이 운동도 하고 외식도 자주 했습니다.

제가 고2 때 다시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대학 준비로 과외와 학원과 독서실의 연속이었습니다. 시험 칠 대학과 전공도 어머니가 정해주셨는데 제가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졌으며 재수를 않고 다시 다른 대학에 시험을 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다행히 합격은 했지만 제 자신이 너무 싫었습니다. 제대로 잘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대학 졸업 후 IMF가 와서 직장을 구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습니다. 그 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제 친구가 하와이 YWAM(예수 전도단)에서 예수 제자 학교라는 것을 수료한 후에 저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했습니다. 하와이에서 정말 저한테는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경험하고 세계 각국에서 온 믿는 자들과 공동 생활을 하면서 서로 다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필리핀과 대만에서 두 달 동안 선교를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냥 가서 “예수 믿으세요.”가 아닌 서로 같이 살면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 다음에 기도도 해주고 하나님에 대해서 간증하면서 전하는 것이 얼마나 파워풀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부터 저는 하나님을 위해 어떻게 살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어머니는 저한테 미국에 있는 신학대학원에 들어가서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니게 된 신대원은 매우 학구적이었고 경험적인 것과 반대로 숙제, 프로젝트와 시험으로 매일 밤에 새지 않으면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언어 소통과 수업 이해력은 문제없었지만 신학준비가 덜된 저로써 너무 힘들었습니다. 미국에서의 2년 반의 생활을 접고 한국에 있는 신대원으로 편입코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전 정말 패배자 같았습니다. 다행히 저와 잘 맞는 전공으로 바꾸고 나서 주님의 은혜로 졸업을 했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내서 성취감도 있었고 영어 석사 논문을 쓴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고 있을 때 전남편을 알게 되었는데 미술을 하는 사람이었고 자유분방하고 멋져 보였습니다. 그의 집안은 가톨릭이어서 당연히 그런 사람하고 만나서는 안 되다 그와 만나면 스트레스가 다 풀렸고 저도 자유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전 매번 만날 때 마다 그에게 강조했습니다. 결혼하려면 개신교로 바꾸고 교회도 열심히 안 빠지고 다녀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저희는 결혼했습니다. 당시에는 교회도 같이 나가고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는 결혼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고 친정 부모님은 대학원에 가서 디자인 공부하면서 취직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 제가 어렸을 때부터 기도했던 쌍둥이 딸이 태어났습니다. 손이 많이 필요할 때 그는 전혀 도와주지 않았고 모든 것을 제가 해야만 했습니다. 직장에 들어가서는 온갖 스트레스를 집에 와서 풀었고 왕 노릇을 했습니다. 툭하면 저한테 소리 지르고 말로 싸우려고 덤벼들었습니다. 저를 비하하는 말을 자주했으며 자존심을 짓밟아 버렸습니다. 결혼해서 첫 직장을 그만둬서 모두를 힘들게 했습니다. 생활이 힘들어도 제가 좋다고 결혼한 사람이니까 부모님한테 한마디도 못하고 가정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두 번째 들어간 직장도 얼마 안 돼서 또 그만 두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고 저한테 마지막 한 달의 생활비를 주고 저더러 나가 일을 해서 쌍둥이를 먹여 살리라고 했습니다. 아빠로서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나 정말 이해가 안 되고 용서가 안 되었습니다. 일을 하고 아이들을 보고 슈퍼우먼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경험했습니다. 집안일도 도와주지 않았고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다고 하면서 집에도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출퇴근이 힘들어서 이사를 가기로 정했고 같이 가겠냐고 했을 때 그가 이제 안 맞아서 같이 못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 시원하기도 했지만 어쩜 그렇게 쉽게 입에서 이혼하자라는 말이 나올까 기가 막혔습니다. 결혼 5년 만에 이혼을 했고 제가 쌍둥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결혼 후에 많은 힘든 일들을 경험했고 왜 이런 일들이 저한테 일어났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살면서 계속 힘든 일들이 있지만 저로 하여금 더 주님을 의지하고 더 단단해지라고 만져주시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제가 가지고 있던 많은 축복을 감사하지 못했고 행복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마음만큼은 항상 감사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아직도 저는 공사 중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계시기에 힘이 덜 들고 같이 걸어갈 수 있습니다. 또 다비다 자매회가 있어서 같은 처지에 있는 분들과 동행할 수 있어서 힘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좌절할 때가 종종 찾아올 때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고 붙잡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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