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감을 넘어 춤추는 평화로/문성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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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2-04-16 14:57 조회47,34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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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감을 넘어 춤추는 평화로
문 성 안
“남편을 잃어버린 지 육년 째다~~”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의 여지를 남겨놓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상실의 아픔에 대하여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죠. 아빠의 기억을 꺼내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삼켜둔 슬픔…….
간단한 수술로 알고 들어갔는데 초조함 속에서 8시간. 다음 날, 병원복도에서 ‘알고 보니 암이었다.’는 의사의 말을 듣던 때부터 몇 년 후 온몸에 암이 퍼진 사진을 볼 때 까지도 난 참담하단 생각은 안했습니다. 적어도 옆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너무너무 사랑 한다 고맙다’고, 나를 안심시킨 그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 그때부터 ‘거절감’은 시작 되었습니다.
‘한숨 잘 테니 당신도 쉬라’고 인사를 한 그는 얼핏 잠든 나를 두고 그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좋았더라고 이야기하리란 표정으로. 천사처럼 웃으며…….
그와 나는 새 길을 꿈꿨지요.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우리가 한 걸음 내딛으면 그곳이 길이 된다고 믿었고, 우리는 기독문화의 오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 땅에 남은 우리가 그루터기라며 공간을 열고 처음인 일들을 했죠. 사역은 무궁무진했어요. 작은 소리를 듣는 일, 외로운 사람들의 쉼터가 되는 일. 물질만능의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 광야학교를 열고 재미있는 교육공간을 만들고, 가정 바로 세우기, 거룩함의 회복, 책 나눔 치유 도서관 운동, 바른 먹거리를 심고 가꾸며 보급하는 일, 울면서 뿌린 씨앗들은 열매가 되었고 폐교를 보러 다니면서 소외된 이들의 쉼터를 마련하려했었지요. 그때 그는 자신의 옆지기가 홀로 되어 무너져 버린 곳에 서 있으리란 상상조차 하지 못했겠지요.
나는 그가 삼킬 수 없을 때까지 수 십 가지의 녹즙을 갈았고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조금만 더 우리를 위해서 그가 이 땅에 머무르도록 해주세요.” 하지만 내 기도는 하나님이 그를 그분 곁에 불러가는 것으로 응답되었지요. 나는 하늘로부터 거절되는 느낌을 맛보았습니다. 홀로 남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버려진 그 기분을.
그것은 내게 하나의 트라우마로 남았습니다. ‘사랑하면 죽는구나…….’ 그래서 어떤 것도 품을 기대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꿈과 비전, 공동체까지 나는 모두 잃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소망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어디에도 내편이 없는 것 같았고. 둘이서 꾸던 꿈은 갈 길을 잃었습니다.
홀로 남은 시간을 극복하는 것에 대한 강의를 했던 어떤 분이 내 그림을 보고 치료를 위한 진단을 받아보라고 했습니다. 내가 봐도 내 그림은 산만했고 중간 중간 끊긴 길은 하늘로 향하고 있었지요. 나를 버린 세상을 포기한 분노의 표현이었죠.
성경은 왜 혼자 남은 사람들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실까. 어느 날 중국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일부러 나를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과부의 한숨소리를 들으시는 분께 기도하시오.” 그때는 혼자 남은 사람의 심각성을 몰랐고, 내가 불쌍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조차 자존심 상했습니다. ‘내 자리가 뭐 어때서!’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알게 되었지요. 아무도 그 말을 들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홀로 된 사람들의 작은 신음소리까지 들으시는 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만, 그 막막함이라니. 어디로 갈지 모르는 방향 없음이라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매순간 고민합니다. 세상은 오라고 손짓을 하건만 교회는 말이 없고. 부부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홀로 있음이 도토리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거절감으로 인한 자격지심일지도 모릅니다. 그것까지 배려해 달라는 것은 내 욕심이겠죠.
두벌 옷도 가질 줄 몰랐고 뼈 속까지 우려내어 베풀곤 했던 그는 갔습니다. 그를 따르던 청년이 그의 장례식에서 먹은 국밥을 ‘스승이 베푼 진국’이라 표현했지요.
화장터에서 훌훌 날아 간 그의 영혼은 나더러 이제 자신으로 인한 굴레로부터 자유 하라 했지만, 난 두 딸과 살아야했고 절실한 삶은 또 하나의 살아 내야할 몫이 되었습니다. 가야할 곳을 알지 못하고 20년 간 목회했던 곳을 떠나왔습니다. 교회에 남아 그곳을 지키라는 권고가 있었지만, 그것은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그와 나의 새 길은 아니었습니다. 장막을 접으라면 접고 펴라면 펴라, 광야의 삶을 가르치던 그의 교훈하는 바를 따라서 내게 익숙한 것들을 남기고 떨치고 서울로 왔습니다.
나는 살아남아야 했고.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어야 했습니다.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는 중성(中性)이 된다. 용감하게, 눈물은 삼키며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열리지 않는 문을 백번이라도 두드려야 합니다. 강청함으로 인해 들어주는 재판관을 바라면서 막막함으로 거리에 던져진 나는 그분께 소리쳤습니다. 여태껏 어떻게 그가 없는 일상을 견디었는지……. 처절한 삶의 자리, 그 언저리에서 몸부림치며 진실이 아닌 거절감을 극복하려 애써봅니다.
아빠의 빈자리가 안타깝지만, 딸들은 나름의 정체성을 갖고 고민하며 당당히 자라났습니다. “아빠 없이 키워야할 애들의 장래를 십자가에 내려놓습니다.” 라고 눈물 흘리던 날들……. 쉽지는 않았지만 늘 우리들의 등 뒤에서 막강한 빽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아빠가 애들의 보호자였지요.
“아버지처럼 사람을 사랑하면서 훗날 사람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아버지가 물려준 중요한 가치관입니다.” 큰아이는 대학 수시입학 원서에 이렇게 썼지요.
연대 재학 중 교환학생으로 작년에 오슬로에 다녀왔고, 교육부지원 대학생연수프로그램 합격, 1년 과정으로 올 사월에는 미국에 간답니다.
자기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서 사춘기 내내 나를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던 둘째는, 인하대공대 기획국장으로 활동합니다. 지금도 ‘강요된 신앙은 노! 노! 노!’ 라 하여 제 맘을 졸이고 있지만, 그 모습이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끼고 싶어 하는 몸부림이라 생각 하며, 교육이 혹여 내 자랑이 된 것이 아닌지 회개합니다.
나의 딸들이 [새길 일구는 기쁨으로 낙엽이 되어 삶의 뿌리를 든든하게 하는 아빠의 삶]을 깨달아 알기를 바랍니다. 봄이 오는 언덕에서 새움 트는 꽃을 보며 열매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봅니다. 현실의 겨울을 떨치지 못함이 부끄럽지만 과부의 작은 소리에 답하는 하늘의 사랑을 매순간 체험하면서…….
그런데도 나는 때론 ‘왜 내 삶이 이것밖에 안되느냐’고 투정을 부립니다. 허지만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서 그렇게 낮아진 그분을 만나고, 그와의 관계를 통해 평안을 찾습니다. 내가 무얼 해서 그 보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평안을.
잃어버린 그는 하늘로 보내고 비로소 내 숨을 회복합니다. 내 존재에 비로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고 잃어버린 꿈, 공동체에 대한 소망을 일으킵니다.
또한 이렇게 다비다 모임에서 삶을 나누며 모델인 목사님과 선배들을 따라, 자리매김하는 그림을 그려보며 살아 움직이는 꿈틀거림으로 다시 외칩니다.
거절감을 넘어 춤추는 평화, 모두에게 평등한 살아 숨 쉬는 샬롬을 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