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조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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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oner 작성일08-11-09 17:43 조회41,383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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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조 정 분
직장 생활하랴, 뒤 늦게 시작한 공부 하랴, 밤낮없이 시간에 쫓기는 생활 속에서 과제를 위해 읽는 책이지만 좋은 책들을 읽게 될 때마다 보람을 느끼고 있다.
얼마 전, 에미상을 수상한 바 있는 방송가이자 칼럼니스트, 베스트셀러 작가인 미치 앨봄(Mitchl Albom)의 저서인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조명한 맑고 따스한 책으로 루게릭 병으로 죽어가는 스승 모리 교수와 매주 화요일마다 10여 차례 만나 나눈 얘기를 책으로 엮었다. 인간에게 죽음은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감동의 내용의 책이다.
난 이 책을 읽는 동안 먼저 하늘나라로 간 남편을 추억할 수밖에 없었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병원 밖으로 나오며 ‘세상이 멈춰져야 되는 것은 아닌가? 저 사람들은 내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나 있을까?’ 라고 생각했던 모리교수님의 생각은 내가 당시 느꼈던 감정과 같아서 책에서 눈을 땔 수가 없었다.
죽어가는 교수님과 그를 곁에서 돌보는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대화들이 나로 하여금 부러움을 느끼게 했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알았더라면.....
그렇다면 죽음에 대하여 다시 한 번쯤은 생각했을 것이 아닌가?
아니, 남편의 죽음이 사고로 인한 것이 아니라 모리교수님처럼 병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와의 마지막 대화를 평생 기억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와병상태의 노인을 부러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것도 죽음이 문지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장 개인적인 일 조차도 누군가의 손을 빌어야 하는 그런 상태에 있는 노인의 경우를 부러워한다는 것이 말이다.
그러나 너무도 급작스럽게 남편을 떠나보낸 사람이라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죽고 난 후라서 이런 생각을 할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이 책이 2판 인쇄 발행하던 해 10월에 하늘나라로 갔다.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고 경제적인 문제가 늘 우리를 숨 막히게 하기 때문에 중병을 앓고 있는 가족을 둔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경제적 고통을 가중되게 받는다는 것을 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치료비는 또 어떻게 충당하고?’ 모리교수님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데 이 책 역시 모리교수님의 병원비를 지불하기위하여 제자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출간 10주년 기념 서문이 실린 책을 구입하게 됨으로써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환자의 입장에서도 고통을 당하는 것 보다 빨리 하늘나라로 가는 편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걸 보면 모리교수님의 상황을 부러워한다는 것이 공감 받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평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처 말하지 못하는 가슴 벅찬 이야기를 그는 전부 했다는 데서 나의 부러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큰 감사의 조건이 아닌가?
언제나 죽음은 우리 곁에 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일이 되기까지는 그 사이에 너무나 큰 괴리감이 있기에 죽음을 직면하기 전에는 죽음이 내 신체와 연결되어있는 그림자라는 것을 망각하며 사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해서는 나 역시 그랬다.
그런 점에서 모리교수님은 죽음을 천천히 맞이하고 그를 사색의 조건으로 삼으며 지혜에 넘치는 자신의 노년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들려주고 마지막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너무나 멋지다. 삶의 마지막에서 이런 대단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람이 얼마나 될까?
내 삶의 마지막도 이러할 수 있을까?
모리교수님과 같은 내 인생의 스승은?
이런 많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며 읽어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사고 소식과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떠난 남편을 생각해본다.
그처럼 허무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라면 살아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았으리라.
남편의 장례식 때 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내 나이가 겨우 32세였으니 죽음이라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한 가지도 제대로 한 일이 없는 것 같다.
장례를 마치고 죽음에 대하여 너무도 무지했다고 느끼며 죽음 학교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삶을 위한 수단으로 많은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교육은 어쩌면 기피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꼭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갖지 않는다.
모리교수의 기발한 생각 그것은 살아있는 장례식을 치르는 일이었다.
난 살아있는 사람이 무덤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나에게 찾아왔다. 남편을 묻기 위해 파놓은 곳에서 내가 들어가야 할 공간까지 파여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살아있는 사람이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본다는 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나는 내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기회가 되었다. 나처럼 슬프게 수업을 받을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수업을 받는다면 끔찍함을 함께 마음에 새기지 않아도 될 것인데....
또 하나 느낀 점이 있다. 그것은 극히 개인적인 일, 예를 들어 소변을 보는 일에 누군가의 도움을 요구하면서 받는 사람이나 도움을 주는 사람 양쪽이 그 일이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노후를 장담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추하고 보기 싫은 모습을 용기 있게 들어 낼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그것이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일까?
이런 수많은 질문들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던져졌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늙는다는 것이다. 늙음에 있어 아름다움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끝으로 모리교수님의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전부 우연이라 믿기에는 우주란 너무 조화롭고 웅장하고 압도적이군.”이란 말이 마음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