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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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oner 작성일09-08-11 18:32 조회44,59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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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유미숙
산처럼 커다란 무게로 힘겹게 살아왔던 결혼생활의 5년은 2001년 3월을 마지막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내가 6살 때 엄마는 뇌졸중으로 편마비가 되셨고 50세가 다 된 연세에 나를 낳으신 아버지는 여느 아버지처럼 아빠라 부를 만큼 젊지 않으셨기에 아빠라 부른 적이 없다.
가슴 한 켠에 항상 자리 잡은 외로움, 분노 같은 것은 절대 드러내지 않는 강자로 나 스스로에게 엄격했고 혼자 생각하기 좋아했고 혼자 있는 게 편했다.
검정고시로 고졸학력을 인정받고 전화 교환자격증을 따서 평범한 저소득 직장인으로 일하다 친구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지만 직장을 계속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몇 번의 유산 끝에 힘들게 아이를 임신했지만 6개월 되던 때 남편이 몇 천 만원의 돈을 빌려 하우스도박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다시는 그 짓을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도박 빚을 청산하고 임신8개월 된 몸으로 식당일을 시작해서 아이를 낳는 날까지 매일 12시간을 일하였다.
출산 후 몸조리는커녕 간신히 셋이 누울 만한 임시 창고 방에서 신생아를 키우며 그 와중에 시어머님이라도 오시면 그 좁은 집에 기본3일은 묵으셨다.
어머님은 신주단지를 모시고 있는 분이었다. 아들을 못 낳아 산 기도를 다니시는 시어머니를 따라다니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어머니 신이 씌어 눌림굿 까지 하셨는데 잘 안됐는지 거의 이마에 끈을 동여매고 계셨다. 철철이 고사를 지내고 막걸리를 붓고 돼지머리를 삶아대셨다. 항상 냉동실에 고사떡이 있었는데 떡을 아주 좋아 떡순이란 별명까지 얻었던 난 지금 그 떡을 먹지 않는다.
아이는 한 달 되던 때부터 식당 구석에서 유모차에 누워 자랐다.
식당일에 쫓겨 안아주지도 업어주지도 눈을 맞춰주지도 못했다. 근처 고등학교 부설 어린이집 원장님께서 아이가 안쓰러웠던지 영아반이 없음에도 아이를 받아 주셔서 15개월 때부터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고, 어린이집이 끝나고 간혹 손님이 많은 날이면 아이를 깊은 김치통 속에 넣고 손님이 주문한 라면을 조금 헹궈 접시에 담아주면 두 시간을 참을 수 있을 만큼 순했다. 그 생각이 나서 난 아이가 라면 먹는 걸 아주 싫어하는데 아이는 어렸을 때 입맛을 들여서인지 라면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어느 날은 유모차에서 나와 온 식당 바닥을 쓸고 다녀 흰 양말이 검은 양말이 된 적도 있었고, 어떤 날은 식용유를 온통 뒤집어 씌어 옷을 다 버리고, 오토바이 배달바구니에 싣고 잠깐 태워주면 소리도 내지 않고 씨익 웃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후에 식당을 정리하고 달랑 전세금 2천만원을 가지고 안양으로 이사를 가서 맞벌이를 하게 되었다.
워낙 고생의 날들이어서 부부관계고 뭐고 다 귀찮았다. 취업을 위한 자격증을 따서 취업을 하고 나 혼자만 나대로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안양으로 이사 간 지 일 년 후 남편은 또 다시 일을 저질렀다. 우연히 신용카드가 발급 된 걸 알았고 다그치니 남편이 각 은행과 캐피탈에서 만든 신용카드가 7-8개였다. 기가 막히지만 채무내역을 일일이 확인해서 컴퓨터로 정리를 하니 1억 가까이 되었다. 남편은 그 당시 월급을 받고 다니던 유통회사를 인수 하겠다 해서 말렸지만 외상으로 물건 가져와 소매점 깔아주고 수금해서 결제 해주고 중간 마진 챙기면 내 돈 들어가는 거 없으니 걱정 말라며 작은 피자재료 유통을 하기 시작했고 강릉에 거래처가 있다며 2-3일에 한 번씩 강원도를 갔고 당시 태백에 카지노가 생겼을 때였다. 난 이혼을 결심했다. 결심하기까지 두려워 술을 먹고 누구한테 하소연 할 데도 없고 술김에 결혼 액자를 부수고 결혼기념일에 사다준 목걸이도 망치로 또각또각 끊어 휴지통에 버리고 부엌칼로 자해를 하려다 차마 못하고 방바닥을 찧고 아이 앞에서 못 볼 꼴을 다 보이고 다음날 정신과에 가 상담하니 의사선생님이 이혼 하는 게 낫겠다고 하셨다.
아이의 친권 양육권을 모두 내가 갖기로 하고 합의 이혼을 했다. 1400만원을 들고 나와 방을 얻었지만 남편의 채권자들이 진을 치는 바람에 15평에 5식구가 사는 언니네 아파트에 6개월을 얹혀살며 속앓이를 했고 좀 더 돈을 벌 전문직을 찾기 위해 1년 여 무직으로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며 전세금은 카드 값으로 거의 날리고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
모든 게 벼랑 끝으로 몰리는 것만 같아 마음은 불안했고 몇 개월을 백수로 전전하다 꽤 큰 부동산에 근무를 하게 되지만 차를 사서 손님을 태워야 되고 계약이 늦게까지 있는 날엔 9시 10시를 넘겼다. 일요일도 한 달에 두 번 쉬고 아이는 아이대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홈쇼핑 선전을 모두 외우고 퇴근하면 날 붙잡고 죄다 이야기 해 주고 집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다시피 했다.
할 수없이 종일반 어린이 집이 끝나고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할머니에게 부탁 해 보육비를 주고 아이를 맡기고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지는 생활을 계속하였다. 남편이 정신 차리면 다시 재결합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 아빠가 여자가 있다는 소릴 듣고 배신감에 결혼 앨범이고 한복이고 사주단자까지 몽땅 기름을 붓고 불살라 버리고 아이마저 막무가내 짐을 싸서 밤중에 큰 댁 문 앞에 세워두고 왔다.
그 후로 6개월을 눈물과 술로 보냈다. 핑계 같지만 아이를 내가 데리고 있다간 둘 다 죽을 것 같았다. 그동안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삶이었지만 아이가 없는 삶은 거의 죽은 삶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지내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다시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이제 죽어도 너와 함께 살아도 너와 함께 하겠다는 말을 지금도 아이는 기억한다. 그 후에도 계속되는 경제적 어려움에 모든 걸 정리하고 쉼터에 입소했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도저히 감정절제가 안 되어 아이에게 손대는 일이 많아졌다. 그래서 언뜻 마음수련이란 곳 팜플렛을 보고 그곳을 찾아 갔다. 일주일간 산속에 박혀 세상 모든 걸 끊고 매일 나 자신을 죽이고 내려놓는 연습을 했으나 그 때는 조금 나아지는 듯했으나 세상에 나오니 조금도 버려진 게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쉼터에 있던 언니가 교회를 다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난 교회에 처음가면 관심 갖고 그러는 것이 귀찮으니 말씀 테이프라도 한 번 들어 보겠다 했고 출퇴근이 한 시간 거리라 매일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일 년 동안 마음수련 했던 곳에서 공감했던 그 말씀이 그대로 성경에 쓰여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말씀 테이프를 다 듣고 이 교회라면 다닐 만 하겠다 싶어 다니기 시작 했다.
새로 다니게 된 직장에선 3-4명의 언니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성경공부를 하는데 다 근무를 하며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일 년을 거의 말씀을 보며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었다.
그 후 아이에게 거의 매를 안 들게 되었고 아이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미 아이는 상처를 받을 대로 받고 마음을 닫아 놓은 상태가 되었다. 심리 검사를 해 보니 집 그림을 그렸는데 창문마다 커튼이 쳐져 있고 현관문마저 잠금 고리로 굳게 잠궈 놓았다.
지금 아이는 바우처 제도를 통해 1년간 심리치료 중이다. 많이 좋아지길 기도한다. 아이는 심리 상담에서 믿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 말했다 한다. 어쩌면 세상을 너무 일찍 깨달았는지 모르지겠다.
더 이상의 절망은 없다. 내 안에는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닌 살아서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매일이 내려놓는 삶이 되길 기도 하며 이 글을 끝으로 더 이상 넋두리 같은 내 인생의 한 점은 여기서 끝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