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많이 고독하고 싶다 (정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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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oner 작성일09-08-11 18:37 조회46,19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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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많이 고독하고 싶다
정희자 전도사
3월은 유난히 나에겐 더디고 긴 침묵의 시간이었다.
세상의 만물은 봄이 오는 소리로 가득하고 그 생명의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리건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아직도 동면에서 깨지 못한 사람처럼 아무 일도 하기 싫고, 생존 앞에서 한없이 고독하고 비굴함을 느끼며 연약한 모습으로 그저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정기모임만은 기를 쓰고 참석했다.
그것마저도 손을 놓아버리면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버릴 것만 같았고, 또한 언제고 조용히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다비다모임 특유의 생명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월드컵경기장을 경유하여 모임장소로 걸어서 오는데, 아직은 시린 바람 끝이지만, 그래도 숨길 수 없는 봄기운이 얼굴을 스치며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한 달만의 만남인데도,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은 그간의 공백이 유난히 길게 느껴짐은 아마도 그동안 내가 깊은 심연에 한동안 빠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임방 안으로, 하나씩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매들 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조금씩 봄기운을 뭍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모임이 시작되고, 찬양을 따라 부르는데, 오늘따라 가사가 가슴을 울린다.
“그의 생명 내속에~ 그의 소망 내 삶에 ~ 그의 능력 내 안에~ 나의 삶 주의 것,
십자가 그 위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
지은 자매가 나와서 자신의 삶을 나누는 시간에는 자녀를 위한 어미의 ‘슬픔의 힘’이 마침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으로 이어지는 기독인의 공식이 다시금 확인되는 시간으로 모두들 공감했다.
이어서 이 영복 이사의 말씀의 시간에는 제목에서부터 눈길을 끌고 예사롭지 않더니만 예상대로 분위기를 차분하고 진지하게 가라앉혔다.
“고독, 사랑 그리고 창조”
마치 이 격조 높은 이 세 단어는 연결고리처럼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련성이 있다.
그 원리와 묵상을 이사님은 자신만의 깊은 통찰을 가지고 그 특유의 경상도 느린 어투로 잔잔하게 펼쳐 가셨는데, 주제가 결코 그리 쉬운 내용이 아님에도 우리 모두에게 설득력 있는 깊은 울림과 여운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매들은 하나같이 소리죽여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었으며, 저마다 깊은 생각에 빠지는 듯 했다. 어쩌면 이 주제는 우리가 천국 문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풀어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이어서 ‘올드보이스 하모니카 연주단’의 현란한 연주를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여러 장르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추억의 가요와 복음송가 동요 등 신명나고 열정적인 연주를 들으면서, 자매들은 오랜만에 그동안의 모든 시름을 잠시나마 털어내고 있었다.
평균 연령이 족히 70을 넘기는 그들의 연주를 보며, 그들 역시 황혼의 고독을 승화시켜 사랑의 섬김으로 아름답게 창조하는,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와도 같은 삶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는 다 고독하다.
그러나 단순히 혼자 있는 외로움과 고독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랑과 창조를 위한 첫 단추가 오히려 고독이고 그 고독은 어떤 의미에선 신의 선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독을 두려워하기 보담 끌어안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 일생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구 같은 존재가 고독이리라.
하지만 그 고독을 반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드물 것이다.
우리는 고독을 마치 뭔가의 결핍으로 오해하고, 그리고 두렵고 멀리하고 싶은 어두움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고독을 사랑과 창조를 부르는 긍정적인 존재로 보지 못하고, 죽음과 절망으로 이끄는 처음부터 나쁜 적군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고독의 기원은 창세기 천지 창조 때부터 시작되었고 고독의 역사는 깊고 오래다.
따지고 보면 성서속의 믿음의 선진들도 예외 없이 모두 고독했으며, 심지어 인간 예수님도 고독했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가 고독을 직접 체휼하여야만 우리의 고독을 이해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사랑을 거절당했을 때, 예수님도 고독에 떨었고 제자들의 무심함에 참으로 고독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고독은 마침내 우리를 구원함으로 완전하게 승화시켜 주셨다.
그날 이사님은 우리의 고독 속에 무엇을 담느냐가 참 중요하다고 말씀 하셨다.
일찍이 내게도, 나만의 고독 속에 채워야할 사명 같은 것이 있음을 늘 느끼고 견디며 살아왔었는데 요즘 그것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웠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고독을 깊이 이해받고 공감 받은 편안함을 느꼈다.
김 혜란 회장님의 마지막 멘트가 아직도 인상적이다.
“나는 더 많이 고독하고 싶다.”
그녀의 이 짧은 말 한 마디 속에 숨겨진 그녀의 고독을 충분히 나는 짐작한다.
다비다자매회는 그녀의 고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바람처럼, 우리는 비록 아프지만 그러나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다.
정희자 전도사
3월은 유난히 나에겐 더디고 긴 침묵의 시간이었다.
세상의 만물은 봄이 오는 소리로 가득하고 그 생명의 아우성이 곳곳에서 들리건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아직도 동면에서 깨지 못한 사람처럼 아무 일도 하기 싫고, 생존 앞에서 한없이 고독하고 비굴함을 느끼며 연약한 모습으로 그저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정기모임만은 기를 쓰고 참석했다.
그것마저도 손을 놓아버리면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버릴 것만 같았고, 또한 언제고 조용히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다비다모임 특유의 생명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내려 월드컵경기장을 경유하여 모임장소로 걸어서 오는데, 아직은 시린 바람 끝이지만, 그래도 숨길 수 없는 봄기운이 얼굴을 스치며 가슴을 설레게 했다.
한 달만의 만남인데도, 그 어느 때보다도 오늘은 그간의 공백이 유난히 길게 느껴짐은 아마도 그동안 내가 깊은 심연에 한동안 빠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임방 안으로, 하나씩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매들 마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조금씩 봄기운을 뭍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모임이 시작되고, 찬양을 따라 부르는데, 오늘따라 가사가 가슴을 울린다.
“그의 생명 내속에~ 그의 소망 내 삶에 ~ 그의 능력 내 안에~ 나의 삶 주의 것,
십자가 그 위에 나 죽었네. 그 사랑 내 속에 강같이 흐르네. “
지은 자매가 나와서 자신의 삶을 나누는 시간에는 자녀를 위한 어미의 ‘슬픔의 힘’이 마침내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으로 이어지는 기독인의 공식이 다시금 확인되는 시간으로 모두들 공감했다.
이어서 이 영복 이사의 말씀의 시간에는 제목에서부터 눈길을 끌고 예사롭지 않더니만 예상대로 분위기를 차분하고 진지하게 가라앉혔다.
“고독, 사랑 그리고 창조”
마치 이 격조 높은 이 세 단어는 연결고리처럼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련성이 있다.
그 원리와 묵상을 이사님은 자신만의 깊은 통찰을 가지고 그 특유의 경상도 느린 어투로 잔잔하게 펼쳐 가셨는데, 주제가 결코 그리 쉬운 내용이 아님에도 우리 모두에게 설득력 있는 깊은 울림과 여운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매들은 하나같이 소리죽여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었으며, 저마다 깊은 생각에 빠지는 듯 했다. 어쩌면 이 주제는 우리가 천국 문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풀어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이어서 ‘올드보이스 하모니카 연주단’의 현란한 연주를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여러 장르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추억의 가요와 복음송가 동요 등 신명나고 열정적인 연주를 들으면서, 자매들은 오랜만에 그동안의 모든 시름을 잠시나마 털어내고 있었다.
평균 연령이 족히 70을 넘기는 그들의 연주를 보며, 그들 역시 황혼의 고독을 승화시켜 사랑의 섬김으로 아름답게 창조하는,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와도 같은 삶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는 다 고독하다.
그러나 단순히 혼자 있는 외로움과 고독은 엄밀한 의미에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사랑과 창조를 위한 첫 단추가 오히려 고독이고 그 고독은 어떤 의미에선 신의 선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독을 두려워하기 보담 끌어안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 일생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친구 같은 존재가 고독이리라.
하지만 그 고독을 반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드물 것이다.
우리는 고독을 마치 뭔가의 결핍으로 오해하고, 그리고 두렵고 멀리하고 싶은 어두움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다.
고독을 사랑과 창조를 부르는 긍정적인 존재로 보지 못하고, 죽음과 절망으로 이끄는 처음부터 나쁜 적군으로만 간주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고독의 기원은 창세기 천지 창조 때부터 시작되었고 고독의 역사는 깊고 오래다.
따지고 보면 성서속의 믿음의 선진들도 예외 없이 모두 고독했으며, 심지어 인간 예수님도 고독했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가 고독을 직접 체휼하여야만 우리의 고독을 이해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사랑을 거절당했을 때, 예수님도 고독에 떨었고 제자들의 무심함에 참으로 고독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고독은 마침내 우리를 구원함으로 완전하게 승화시켜 주셨다.
그날 이사님은 우리의 고독 속에 무엇을 담느냐가 참 중요하다고 말씀 하셨다.
일찍이 내게도, 나만의 고독 속에 채워야할 사명 같은 것이 있음을 늘 느끼고 견디며 살아왔었는데 요즘 그것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웠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고독을 깊이 이해받고 공감 받은 편안함을 느꼈다.
김 혜란 회장님의 마지막 멘트가 아직도 인상적이다.
“나는 더 많이 고독하고 싶다.”
그녀의 이 짧은 말 한 마디 속에 숨겨진 그녀의 고독을 충분히 나는 짐작한다.
다비다자매회는 그녀의 고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바람처럼, 우리는 비록 아프지만 그러나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