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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 김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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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9-01-18 17:25 조회25,1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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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김영경

 

나는 1969년 오 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엄마는 나를 잉태하고 사과가 먹고 싶었는데 어렵게 구한 세 개의 사과 중에 한 개에서 벌레가 나와 놀랐다고 했다.

나는 섣달그믐날에 태어났다. 당시 부모님은 큰집에서 조부모님과 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친척들은 설날을 맞아 모였는데 내가 태어나서 제사도 못 드렸단다. 그 와중에 어른들은 내 이름을 지어 주고 관심을 보였다.

내가 자란 마을은 ‘울계’라고 불리었다. 산 모양이 닭이 울고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마을 중앙으로 냇가가 흐르고 있었다. 주위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는 김해김씨 집안의 7남매 중 3남이었다. 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아서 온 마을이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아버지는 지능에 약간의 장애가 있었다. 마음은 순수하고 올곧았으며 성실하고 착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안면도가 고향이고 딸이 많은 이유로 딸 고만이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단다. 어머니는 청각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부지런하고 정직했다. 평소 감정표현을 거의 안 하고 변함없는 분이었다. 두 분은 우리 오 남매를 키우면서 체벌이나 폭언을 거의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장애로 인해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자녀들의 필요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육아는 방치에 가까운 방목이었지만 우리는 큰 사건 없이 지냈다.

나와는 열 살 차이가 나는 막내가 태어난 날, 엄마가 산고를 치르는데 우리는 방안에서 지켜보았다. 막내아들이 태어나 부모님은 기쁨이 컸다. 주로 착한 둘째 동생이 아기를 업어주었다.

우리는 마당에서 흙 놀이를 많이 하고 놀았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버지의 등이다. 동네 마을을 갈 때면 아버지는 나를 업고 갔다. 곡식들이 자라는 푸른 논과 밭을 지날 때면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하게 나의 두 다리를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내가 자주 체해 배가 아팠을 때도 아버지는 나를 업고 산밑에 침쟁이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때 자국이 있는 까만 발에 침을 맞곤 했는데 감쪽같이 나았다. 아버지의 등을 생각하면 지금도 따뜻한 기분이 든다.

나는 7살 때 엄마에게 한글을 배웠는데 야학에서 배운 엄마는 깊이 있게 가르쳐 주지는 못하였다. 나는 책을 못 읽어 나머지 공부를 하곤 했다. 친구들이 모두 가고 몇 명 안 남아 있으면 나는 몹시 불안했다.

학교에서 오리쯤 걸리는 집까지는 제법 큰 산을 돌아가야 했는데 나는 그 산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같은 마을 아이들이 모두 간 날! 나는 두려움으로 울상이 되었다. 그런 나를 보고 수진이가 들어와서 조용히 내 귀에 책을 읽어주면 나는 큰소리로 읽었다. 조는 척 계신 선생님이 통과를 시켜 주었다. 운동장에 나오니 친구들이 나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때 산머리에는 주황빛 태양이 걸려 있었는데 나는 안도감과 감사, 창피함을 동시에 느꼈다.

신작로를 따라 집에 가는 길에 달리던 군용트럭에서 군인들이 건빵봉지를 던져 주었다. 받아든 순간 기쁨과 감사로 마음이 충만했다. 같은 시기에 또 다른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나는 화장실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햇빛에 주위가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깨끗이 치운 화장실 주변은 쓸었던 비의 자욱이 보일 정도로 정돈이 돼 있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위에 신경을 썼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용기가 안 났다. 내가 오줌을 누려고 하면 누군가 나타나 창피를 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저 무서운 네모난 구멍에 앉을 용기는 더욱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수업은 진행되고 있는데 화장실이 무서워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 중앙에 네모모양으로 뚫려 있는 구멍! 그곳에 빨려들어 갈 것 같아 늘 두려웠다. 이 상황은 오랫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겁이 유난히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시간 오줌싸개로 지내야만 했다. 누군가 나의 고통을 헤아려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감사한 기억도 있다. 할아버지다!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한 할아버지가 반가이 손짓으로 부른다. 허둥지둥 달려간 나의 손을 급히 잡고 할아버지가 간 곳은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점방이다. 할아버지는 나의 두 손 가득히 귀한 과자를 사 주었다. 항상 나만 보면 이렇게 과자를 사 주었다. 나는 친할아버지도 아닌 먼 친척 할아버지가 베풀어 주는 이 은혜가 항상 감동이었다. 누군가가 무조건 끝없이 베풀어 주는 사랑! 배고프고 모든 것이 귀할 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아이에게 그 할아버지가 베풀어 준 사랑은 자애로운 웃음과 함께 오랜 시간이 흘러갔어도 나의 가슴에 따뜻한 기억으로 좋은 추억의 자산으로 남아 있다.

목요일 저녁에는 교회에서 어린이 예배를 드렸다. 나는 어둠이 무서웠다. 등잔불이 바람에 출렁거리며 꺼지려 하는 순간에도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목요일 저녁! 동생들과 같이 예배를 드리고 밤늦게 집으로 가는 길은 나를 항상 긴장하게 하였다. 밀과 보리가 나의 키만큼 자란 밭에서 무언가 나올 것 같아 떨렸다. 어린 동생들과 걷는 발걸음마다 곡식들이 서걱서걱 기괴한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달빛이 산과 밭을 비추고 무성한 곡식들이 바람 따라 어두운 그림자를 출렁이면 나의 심장 뛰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달빛이 없는 캄캄한 밤도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목요일 어린이 예배는 꼭 참석했다.

겨울이면 동생들과 같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갈퀴로 솔가리를 긁고 죽은 나무뿌리를 발로 차서 모은 후 볏가마니에 가득 채워 메고 집에 오는 것이었다. 나는 산에 나무하러 가는 것이 즐거웠다. 햇빛 사이로 빛나는 나무들은 항상 내 마음을 시원하게 열어 주었다. 발밑에는 솔가리가 두껍게 쌓여서 푹신푹신한 것이 나의 몸을 저절로 춤추게 하였다. 코로 벌름벌름 나무 향내를 맡았다. 숲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행복한 기분이었다. 또 동생들과 같이 냉이와 달래, 쑥을 캐러 온 들판을 헤집고 다녔다. 샛터 아줌마에게 팔러 가는 것이었다. 손가락에 와 닿는 흙의 찬 기운! 부지런이 냉이와 쑥을 캤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겨울바람도 나의 땀을 식히지 못했다.

가을에는 코스모스꽃 가득히 핀 신작로를 따라 아이들이 모여 등교를 하였다. 친구 오빠가 나를 불렀다. 이번 학기 성적이 잘 나와 내가 누군가 궁금했다고 했다. 나의 마음에 자긍심이 샘솟듯이 솟아 올라왔다. 언제부터인가 마을 어른들을 만나면 나를 보고 공부 잘 하는 아이라고 칭찬을 해 줬다. 어른들의 웃는 얼굴과 격려가 나의 자존감을 키워 주었다.

가난하고 모든 것이 귀했던 어린 시절, 나의 성장은 교회에 다니며 알게 된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배려해준 마을 공동체가 있어 가능했다.

 

 

* <작은나귀> 책을 낸 김영경 자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또 다시 새로운 앞날을 향해 나아가는 계기로 삼고자 서울 ‘강남구립즐거운도서관’에서 개설한 ‘자서전 쓰기’ 수강을 끝내고 자서전을 썼습니다. 작품집에 실린 내용을 이번 회부터 5차에 걸쳐 연재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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