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해 주실 하나님을 믿고 바라나이다 / 최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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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1-04-07 14:05 조회18,22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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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해 주실 하나님을 믿고 바라나이다
최연희
제가 벌써 다비다 모임에 나온 지가 벌써 25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잠실 중앙교회에서 5명 정도 모여 예배를 드리고 지하 식당에서 칼국수를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납니다. 다비다 모임이 늘 기다려졌고 이 모임이 좋아 직장에서든 교회든 싱글맘 엄마들이 있으면 데리고 나왔던 생각도 납니다.
제가 속한 순자조의 조장님이 이달 모임에서 저의 삶을 나누어 보라는 권유를 해와 일단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어 지하철을 타고 운길산역에 내려 ‘물의 정원’을 찾았습니다. 공원 안에 있는 ‘마음의 정원’ 이라는 곳에서 본 글귀에 마음이 사로 잡혔습니다.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뚝 서서 세상에 몸을 내 맡겨라 관용하고 굽힐 줄 알아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어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아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마지막 말이 제 마음을 흔들어 주었고 “그래 간증을 해보자.”라는 용기를 얻게 했답니다.
저는 경기도 양주 미군부대 기찻길 옆 아담한 집에서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와 살림만 하시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넉넉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직업군인을 그만두고 새로운 사업을 위해 서울로 이사왔는데 그 후로 아버지의 사업이 잘 안 풀려 점점 돈은 바닥을 보였습니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초등학교 생활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청년시절을 지나면서 저녁 7시부터 새벽 4시까지 기도와 말씀을 듣는 집회에 참석하는 등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던 것 같습니다. 교회 반사와 청년부 부회장, 성가대원 등 다양한 봉사를 했으며, 기도 중 성령체험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스무 살 되던 해, 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갑자기 눕게 되었는데 난치병인 심한 건선 피부병에 걸렸습니다. 속옷에 고름이 달라붙어 가위로 잘라내야 했고 피부병이 배에서 얼굴과 머리로 올라와 한참 예민했던 나이에 감당하기 위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낮에는 거의 집안에서 있다가 엄마가 그때 판교에 있는 나환자촌에서 지어온 약을 먹고 어두워지면 모자를 쓰고 교회에 가서 엎드려 저의 병든 몸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던 생각이 납니다.
부모님은 사업실패를 거듭하시면서 마음을 많이 쓰셨던지 엄마는 위암으로, 아버지는 당뇨에다 대장암과 간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엄마는 병상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셨고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세례 받고 주님을 영접하셨습니다. 그래도 제가 살면서 잘했던 것은 부모님의 영혼구원을 위해 인내하고 기도하여 응답받은 것입니다. 저에게는 가장 큰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성가대지휘자 소개로 전 남편을 소개받았습니다. 남편은 잘생겼고 노래도 잘하고 악기도 잘 다루고 신앙도 생활력도 있어 보였지만 가진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악기 레슨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결혼 후 저는 피부약 때문에 아이가 생기는 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의사 말에 신경이 쓰여 새벽마다 건강한 자녀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연분만 30분 만에 순산한 아들 요한이가 지금 31살이 되었습니다. 결혼생활은 남편의 외도 등 우여곡절 가운데 2년 만에 끝이 났습니다. 스물일곱 살 때였습니다. 아들을 돌 때부터 혼자 키우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이혼소송 과정에서도 끔찍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남편이 요한이를 저 몰래 서울이 아닌 전라도에 사는 시누이한테 맡겨놓고 보여주지 않고 폭력을 일삼아 힘이 들었는데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시누이 집근처 놀이터에 놀고 있던 아이를 데리고 서울 가는 고속버스를 탔습니다. 버스 맨 뒷좌석에 요한이를 꼭 껴안고 소리 없이 울면서 가고 있는데 유괴범이 아이를 데리고 갔다는 남편의 신고에 전 고속버스에 대한 검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버스기사 아저씨가 울고 있는 저를 보시더니 “진짜 엄마네.”하고 혼잣말을 하시더니 검문할 때마다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서울 남부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저는 가지고 있던 돈으로 아저씨께 담뱃값이라도 하시라며 감사의 표시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막상 너무 보고 싶어 데리고 왔지만 당장 아이를 키울 환경도 마땅치 않아 큰언니 집으로 갔는데, 아이가 울 때 형부가 “애비 없는 놈”이라고 말한 것이 서러워서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서 생활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저한테 잊지 않고 질문을 하더라고요. “엄마, 우리 아빠는 나 3학년 되면 온다고 했잖아.” 표현은 안했지만 아들은 마음속으로 아빠 볼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야 말할 수 있겠다 싶어 사실대로 말을 해주자 그렇게 천진난만했던 아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소리 없이 뚝뚝 흘렸습니다.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아들이 질풍노도와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얼마나 엇나가기 시작하는지 감당하기 힘들어 혼자 많이 울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 후 대학교를 졸업하고. 의경을 나왔는데 어느 날 여자 친구랑 친아버지를 만나고 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인터넷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고 싶어 찾아간 아들에게 아버지라는 사람의 첫 마디가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찾지도 말고 보러 오지도 말라.”고 하면서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라고 하고 돌아가라며 차비 2만원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저도 기가 막혔습니다. 따뜻한 말이라도 한 마디 해주고 용서를 빌었다면 아들은 지금처럼 방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8년 전 갑상선암 수술을 했는데 악성종양 18개를 제거했고 그에 따른 심한 부작용으로 지금까지도 안면마비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안면마비로 몸 안에 모든 장기들이 오그라들어 숨을 크게 쉴 수가 없으며 눈꺼풀까지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조금만 몸이 힘들어지면 호흡장애가 와서 응급실에 여러 번 입원했던 기억도 납니다.
작년 8월에는 출근하다가 발가락이 골절되어서 치료를 받던 중 어깨관절도 심하게 안 좋아져 수술을 했습니다. 갑상선을 제거한 탓에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회복이 안 된다고 합니다. 현재 재활치료중입니다.
어느덧 봄이 왔네요. 가끔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담장 밑에 꽃들이 너무 예뻐 발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 계절마다 피는 꽃들이 다 다른데 제 인생의 꽃들은 언제쯤 피게 해주실래요?”라며 마음속으로 질문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는 꽃으로 피어나게 할 것이다.”라며 제 마음을 울려줍니다.
“그럼 앞으로의 나의 사명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냥 나를 잘 믿고 살아주는 것. 그러다가 감사한 일들이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감당한 만한 선한 일들을 하는 것이 너의 사명이란다.”라는 답이 옵니다.
또한 내가 제일 힘들어 하는 자녀에 대해 생각할 때는 “아들 요한이는 너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란다. 요한이를 너한테 맡기는 것은 네가 요한이에게 딱 맞기 때문에 이란다.”고 하나님은 속삭여주십니다.
그래서 제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요한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아들, 하나님 뜻에 맞는 아들, 하나님과 딱 붙어사는 아들이 되게 해주세요.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든 만남의 축복을 주시고 하나님을 잘 알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아들이 되게 해주세요.”
제 삶을 나누면서 깨달았습니다. 남과 비교하여 오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수도 없이 힘들어 했던 저 자신의 내면을 보았습니다. 내 기준대로 판단하고 교만을 앞세워 살았습니다. 죄책감에 빠져 기도도 막혔고 찬송도 안 나왔고 정말 하나님을 면목 없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언제나 하나님은 저를 기다려주셨고 맞이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모든 질병과 통증, 그리고 마음의 상처들도 치유해주시리라는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의 삶은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들의 연속이기를 소원합니다. 제 삶 가운데 동행해주시는 다비다자매들이 참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