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소릴 들어봐 / 남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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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1-02-15 11:11 조회18,59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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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소릴 들어봐
남순자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다.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 가슴에 아기가 등을 대고 안겨 있다. 바람이 불어 아기랑 엄마의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날린다. 그리고 엄마가 아기에게 속삭이는 듯하다. “바람 소릴 들어 봐”라고.
이것은 큰 아이가 조각한 모녀 상이다. ‘바람 소릴 들어 봐’는 작품명이며 우리 딸이 만든 작품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눈, 코, 입이 또렷하지는 않으나 두 걸음 물러서서 보면 분명 다정한 모녀의 모습이다. 처음 작품을 접했을 때 나는 골똘히 살펴보았다. 과연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일까? 아기를 양손으로 포근히 감싸 안은 자태는 따뜻함이 전해 온다.
“바람 소리라.” 나는 입속으로 읊조려 보았다. 싱그러운 어느 봄날 바람이 대지를 깨우고 오색의 꽃을 피우는 그런 소릴 들어 보란 것일까. 아니면 외톨이 소녀가 착한 일을 했는데 언덕에 앉아 있으려니 부드러운 바람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란 동화 속의 바람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열정의 여름을 지나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잎을 떨어뜨리는 쓸쓸한 초동의 바람인가. 여러 가닥으로 생각이 피어올랐다.
작업실에서 며칠 만에 돌아온 딸에게 나는 물었다.
“‘바람 소릴 들어봐’라는 작품은 무슨 뜻이야?” “엄마, 그 작품은요,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예요. 바람결 따라 들려오는 슬픈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거예요.”
그 순간, 내 가슴속에는 뭉클한 그 무엇이 지나가고 있었다. 홀로 아이들 키우기에 바빴던 지난날들, 정작 마음속에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는데도 제대로 표현 한 번 해주지 못한 나, 그래서 딸아이는 외로웠나 보다. 그동안 나는 큰 착각 속에서 살았다. 모든 어려움을 내가 맡는다. 내 우산 아래서 어려움 없이 성장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녕 가슴속에선 갈바람이 불었다.
십 수 년, 나는 동네 상가에서 침구 일을 했다. 이곳 서울 변두리에서 딸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생업에 매달려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공원 한 번 가보지 못했다. 뿐만이 아니라 학교행사에도 거의 참석을 하지 못했다. 소풍은 물론, 운동회도 외할머니 손에 맡겨 보냈다.
방학이 되면 잠에서 덜 깬 아이 손을 잡고 나는 새벽시장엘 나갔다. 물건 구입을 하기 위해서다. 이른 시간이라 짜증을 낼 법도 한데, 조잘대며 물건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잘도 따라다녔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엄마가 일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아이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그 쓸쓸함을 이겨 내며 넉넉지 못한 환경에서도 딸아이는 잘 자라 주었다.
이제 딸은 나름의 음향대로 살아갈 것이다. 조각공모전에 응모해서 상패를 안겨준 날도, 학사모를 쓰던 날도, 딸아이는 나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계절마다 부는 바람 속엔 내 기쁨과 슬픔도 함께 있었다.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딸은 한 마디 덧붙인다. “엄마, 그 바람 속엔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많아요. 오늘이 흐렸으면 내일은 다시 해맑은 태양이 떠오른다. 열심히 일하고 당당하게 살아라. 이런 말들요.” “그래, 내가 그랬지.”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이제 바람 소릴 들려주던 젊은 엄마는 어느 사이 그 딸을 의지하며 산다. 때때로 친구가 되어 주고 나를 감싸 주는 울타리다. 어찌 보면 바람 소리를 들으며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앞으로 20년 세월이 가고 나면 나는 그 딸의 말을 들으며 살 것이다. “어머니, 바람 소릴 들어 보세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