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다를 알게 되어 행복한 사람 / 박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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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3-12-12 10:58 조회5,72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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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다를 알게 되어 행복한 사람
박미자
안녕하세요? 저는 인천에 살고 있는 박미자라고 합니다. 다비다에 오게 된 건 2018년 8월 다비다 캠프를 한다는 소식을 어느 ‘기도방’을 통해 접한 7월부터였습니다. 가족적인 분위기가 참 좋았고, 많은 분들의 격려 속에 캠프에 참여하였지요. 그 이후로 계속 다비다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편과 사별한지 9년차가 되어 갑니다. 둘째 은별이를 임신한지 6개월이 되었을 무렵 남편이 췌장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날벼락 같은 일이었죠. 그때 첫째 경준이는 2살이라서 아직 보살핌이 필요했고 병원에 반복적으로 입원하는 남편을 도와야 했기에 시댁과 합치게 되었어요. 물론 신랑이 아픈 후로 병원비와 늘 지출되는 돈 부담도 너무 힘들었고요.
그렇게 최선을 다해 간호했지만 신랑은 은별이가 태어나고 100일쯤 되었을 때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아이들은 아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요. 만 36개월 이전엔 기억이 남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에 펑펑 울었네요. 그때 경준이는 26개월이었으니 당연한 거지요.
신랑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저는 왠지 눈물 한 방울도 안 나오더라고요. 주변에선 참 독한 여자라고 하더군요. 정신이 나갔는지 저는 남의 장례식장에 온 기분이었고, 경준이도 아빠가 죽었는지도 잘 모르고 뛰놀더라고요.
저는 신랑이 그렇게 가고 난 후 갈 곳이 막막했어요. 친정에서 너는 시댁 근처에서 살고 본인들이 있는 곳은 오지도 말라고 했었거든요. 결국 저는 시댁에서 시부모님과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시부모님도 형편이 좋지 않아서 수급자 신청을 하게 되었고 함께 생활을 했어요. 경제 상황이 어려워 저는 요양보호사라는 자격증을 따서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제가 벌 수 있는 돈이 적어 그중에 버스비 10만원을 빼고 거의 나머지는 시댁에 생활비로 드렸지요.
결국 따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시아버님께 100만원을 달라고 부탁했어요. 시아버님은 본인이 청약저축을 넣은 게 딱 100만원이었는데 그걸 해약하고 저에게 주셨답니다. 그 돈으로 원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저도 따로 나와 살고 시아버님 네도 따로 사시니 저는 더 벌 수 있어서 좋았고 시아버님 네도 수급비가 더 나오더라고요. 오히려 두 가정에게는 나은 선택이었어요.
그렇게 일하고 근로장려금을 모으고, 근로복지재단에서 만 7세 미만 자녀 대출이 있기에 500만원 대출을 받아서 지금은 투룸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의료 수급자라서 벌 수 있는 금액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시어머님 가족 요양과 또 다른 어르신 2시간을 하고 있던 와중에, 지난 7월 배가 아프시다고 응급실에 가신 시어머님이 췌장암 같으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국제성모병원에 갔는데 두 달 정도 검사한 결과 췌장암이 간으로까지 전이된 4기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지금은 체력이 안 되셔서 방사선 지료 진행 중이시고, 그 후유증인지 뇌경색이 살짝 오셨고 눈이 뿌옇게 안 보인다고 하시네요. 그래도 아직까지 큰 고통이 없으시니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잦은 입원으로 시어머님 가족요양을 못한 저는 수입이 너무 없었어요. 8월엔 근로장려금을 받아서 괜찮았지만 마냥 이렇게 적은 수입으로 버티기 어려웠답니다. 그러던 중 월, 수, 금 3시간씩 일자리가 생겨서 감사하더라고요. 이 또한 주님이 주신 은혜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대출을 받으면서 알게 되었던 충격적인 사실은 제가 엄마, 언니라고 부르던 분들이 친엄마, 친언니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20대 때도 너무 저한테만 모질게 굴어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보면 엄마 이름이 올라왔기에 그렇게 믿었거든요. 대출을 받으면서 보니 정산 정정이라면서 뜨더라고요. 처음엔 너무 놀라고 손이 떨렸습니다.
그래서 계속 기도했어요. 기도하던 도중에 문득 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말이 ”난 너의 모든 것도 용서하는데 너는 왜 못하니?“이었어요. 주님의 음성이었죠.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새엄마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그리고 제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지요. 오해를 풀고 지금은 가끔 명절 때 인사하러 갑니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이해와 포용을 하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저는 앞으로 요양보호사 일을 계속할 겁니다. 지금 6년이 넘어섰는데, 이 일은 저한텐 천직 같아요. 제가 하는 일이 힘들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잖아요.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감사하면서 살다보면 좋은 날들도 많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행복합니다. 다비다를 알게 되어서 주님을 알게 되어서 행복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