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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담을 넘은 가지여(창49:22~24) /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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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4-09-26 14:29 조회2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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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담을 넘은 가지여(49:22~24)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들어가는 말

 

20215월 정기모임 오는 길에 제가 안젤라 장미를 보며 썼던 3행시 기억나시는지요? 담장에 안젤라 장미들이 모여 정다이 피어 있는 풍경을 보고 다비다자매들을 떠올리며 썼던 시였지요. 곡도 만들었는데 노래로 불러볼게요.

 

안아줘도 되나요? 안 된다고요? 가시에 찔린다고요?

젤 예쁜 만큼 젤 여린 그대. 사랑스런 안젤라여

라선(螺線) 홀로 감을 손 그대에게 없으니 내가 어떡해야 하죠?

등이라도 내어주고 싶은 이내 마음 오, 그대는 아시나요?

 

오늘은 다비다자매들을 닮은 또 다른 꽃으로 써본 3행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름에 피는 꽃입니다. 무슨 꽃일까요? 사진을 띄워주세요. 능소화입니다. 운을 띄어주실래요?

 

능히 저 하늘보다 높이

금세 오를 것 같은 기세,

실은 그분의 시간에 맞춰

조금씩 이끌려 올라갈 뿐입니다.

 

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

아이로니컬한 침묵의 나팔,

차마 고개 들지 못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화려한 주황 꽃들과 함께

결실을 향하는 초록 줄기들의 행진,

살며시 발자국 하나둘 찍으며

하늘에 맞닿은 푸른 담을 넘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능소화 꽃 이야기를 조금 해보겠습니다.

먼저 능소화는 한자로 쓰면 능가할 능(), 하늘 소(), 꽃 화()입니다. 하늘을 능가할 정도로 위로 올라가며 피는 꽃이라는 의미지요. 영어로는 ‘trumpet creeper’로서 나팔과 기는 것의 합성어인데 나팔 모양의 덩굴식물로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능소화는 예쁜 나팔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데도 누구를 향해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리워는 하되 침묵하는 꽃입니다. 이를테면 김수희 가수가 부른 애모라는 노래의 마지막 부분, “사랑 때문에 침묵해야 할 나는 당신의 여자, 그리고 추억이 있는 한 당신은 나의 남자여.”라는 노래가 잘 어울리는 꽃이지요.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이 노래를 참 좋아했다고 하지요. 열린음악회에 나와서 맨 마지막을 당신은 나의 친구여.”라고 개사해 불렀지요. 제가 다비다자매들을 위해서도 부르고 싶은 노래입니다.

또한 무슨 죄라도 지은 듯 오를수록 고개를 쳐들기보다는 고개를 숙이는 꽃입니다. 능소화의 자는 능멸이라고 할 때의 자이기도 합니다. 깔본다는 의미지요. 하늘보다 높이 오를 기세이지만 결코 하늘을 능멸하지 않는 꽃입니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주황색 능소화 꽃이 통째로 툭툭 떨어지는 풍경은 괜스레 눈물짓게 합니다. 땅에 떨어진 꽃송이가 모여 있는 것을 보면 떨어지면서도 홀로가 아니고 함께 떨어졌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꽃이 진 자리엔 기둥 모양의 열매가 맺힌답니다. 함께 울고 웃는 것만 아니라 무덤까지도 함께 가는 사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라는 제가 쓴 노래의 첫 가사처럼 무덤까지 따라가는 듯한 사랑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은 창세기 49장의 요셉과 우리 다비다자매들을 연결하여 능소화라는 시를 쓰면서 제가 묵상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창세기 49장에는 야곱이 아들들을 불러 후일에 당할 일에 대해 유언을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창세기 4922~26절은 요셉을 위해 남긴 축복의 말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로 시작합니다. 무성한 가지인데 어떻게 무성한 가지일까요?

 

2. 샘 곁에 뿌리를 내린 가지

 

첫째로 샘 곁에 뿌리를 내린 가지입니다. 물이 솟아나는 샘이 가지가 번성하는 생명의 원천이 된다는 의미지요.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시냇가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영적으로는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요.(1:2)

요셉은 바로 그런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샘 곁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뿌리를 내렸던 것이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야곱의 샘에 물을 길어 왔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물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737~39절을 보십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3. 절로 많은 열매를 맺는 가지

 

둘째로 많은 열매를 맺는 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의 무성한 가지는 열매가 많은 가지를 의미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열매 맺는 포도나무 가지’(fruitful vine tree)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샘 곁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풍요로운 열매가 맺힌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찰라흐의 삶이었습니다. 히브리어인 찰라흐는 형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형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적인 형통과는 다릅니다.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을 의미하고, 결과보다는 과정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요셉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결과보다는 17세 때 형들의 미움을 사서 구덩이에 던져지고 13년의 연단을 거치며 하나님을 알고 신뢰해가는 내적인 성숙의 과정이 형통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과정이 형통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로마서 828절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창세기 3923절을 보십시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형통의 비밀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에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죽기 전에 노예로 팔았던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50:19)라고요.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성령의 은혜로 인해 생명으로 풍성한 가지가 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요한복음 1010절에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대로 생명을 얻고 또 풍성한 삶의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요한복음 155절을 보십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는다는 비밀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4. 담을 넘은 가지

 

셋째로 담을 넘은 가지입니다. 어떻게 가지들이 담을 넘었을까요? 요셉의 삶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통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 했다가 노예로 판 형들, 자기를 유혹하다가 누명을 씌워 옥에 갇히게 한 보디발의 아내, 자신이 꿈 해석을 해서 풀려난 술 맡은 관원장의 망각 등에 대해 침묵하고 기다리고 용서하고 관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가지는 그렇게 침묵과 기다림, 용서와 관용의 꽃을 피우며 하나님과 함께 담을 넘었습니다.

저는 우리 다비다자매들에게서 찰라흐의 은혜로 담을 넘는 모습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함으로써 다비다자매들이 찰라흐하게, 형통하게 되었다. 침묵과 기다림으로, 용서와 관용으로 기도하며 고난의 담을 넘었다. 머뭇거리던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을 넘었다.” 그렇게 넘은 담입니다. 힘들었지만 쉽게 넘은 담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넘은 담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진 자는 스스로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확장성을 가집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생명의 전달자로서 담을 넘어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갑니다. 다비다자매회의 설립목적도 그렇잖아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먼저 치유 받고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로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하 붙임 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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