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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성의 조화 /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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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0-06-09 18:44 조회7,6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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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영성의 조화

이영복 장로(다비다자매회 사무국장)

 

1. <숨으로 쓴 연가> 피드백

 

“글을 읽어보니 하나님한테 푹 빠졌어. 항상 하나님만 생각하나 봐. 글이 그렇게 되어 있어. ‘관상적 활동가(contemplative activist)’인가 봐. 일하면서 관상(觀想)하고 관상하면서 일하는 하나님 매니아(mania).”

작년에 낸 졸저 <숨으로 쓴 연가>를 읽고 고등학교 동기이자 대학 동기인 한 친구가 들려준 말이다. 가톨릭 신자인 자신이 영적 목표로 삼고 있는 ‘관상적 활동가’를 개신교 신자인 내게서 발견했다며 내가 참 부럽다는 마음을 담아 보내온 것이다. 내가 쓴 책에 대한 피드백(feedback)의 표현 중 가장 진한 격려의 말이자 가장 무거운 부담의 말이다. 우리말로 관상(觀想)은 묵상이나 명상을 떠오르게 하나, “사랑의 마음으로 자세히 바라본다.”, “(하나님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한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고, 영어(comtemplation)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함께 머무는 것’이란 뜻이 담겨 있다. 그러기에 친구가 말한 ‘관상적 활동가’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통해 그분 안에 고요히 머무는 ‘관상적 삶’과 그에 따라 실천하는 ‘활동적 삶’의 균형을 이룬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친구의 피드백을 받자마자 든 두 가지 생각. 하나는 “내가 정말 일상 속에서 항상 하나님에게 푹 빠져 있는 하나님 매니아인가?”라는 자성(自省)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데도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 간에는 뭔가 다른 게 있다는 듯한 뉘앙스는 뭘까?”라는 자문(自問)이다.

 

첫 번째에 대한 답은 곰곰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 “아니다. 아직 멀었다.”이다. 굳이 토를 단다면 아직 갈 길은 멀고멀지만 ‘관상적 활동가’보다는 ‘활동적 관상가’를 꿈꾸고 있다고. 두 번째에 대한 답은 신앙의 컬러 내지 영성의 차이와 연결할 수 있겠지만, “어느 쪽이든 그분의 은혜 안에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 안으로 끌어 들이면 뉘앙스 차이는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는 것.

어쨌든, ‘관상적 활동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활동적 삶과 관상적 삶의 조화에 큰 가치를 부여한 친구의 말은 자연스럽게 성경에 나오는 두 여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영성에 관해 다시금 묵상케 했다.

 

2. 마르다의 영성과 마리아의 영성

 

예루살렘 외곽 베다니에 살던 마르다와 마리아. 예수님께서는 두 자매의 집을 자주 들러 친밀한 교제를 했고 오빠 나사로의 죽음과 예수님의 다시 살려주심이 그들의 영성을 한층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두 자매의 영성은 대조를 보였다.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는 요한복음 11장 20절만 보더라도 서로 다른 것이 드러난다. 언니 마르다의 영성이 ‘이성의 추론에 근거한 합리적인 활동가의 영성’이라면 동생 마리아의 영성은 ‘마음의 사랑에 근거한 직관적인 묵상주의 영성’으로 구분된다. 간단히 ‘일의 영성, 봉사의 영성’과 ‘예배의 영성, 말씀의 영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마르다는 예수님께 좋은 음식을 대접코자 하는 열정이 컸다. 그러기에 자신의 부엌일을 돕지 않고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게 부엌일을 돕게 하라고 예수님께 요청했다. 예수님은 거부했다. 그녀가 부엌일을 하면서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도 듣고 싶어 왔다 갔다 하며 한 쪽에 집중하지 못하고 분심(分心), 즉 마음이 나눠지는 모습을 보인 점에 대해 충고도 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엄청난 비밀을 마르다에게 알려주셨다는 것,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확신하게 된 마르다의 달라진 행동에 나는 주목하고 싶다. 요한복음 12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을 위해 벌인 잔치에서 마르다가 일에 집중하고 더 이상 예수님 말씀만 듣는 마리아를 지적하지 않은 채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섬김의 영성이다.

 

그에 반해, 마리아는 언니가 하는 부엌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는 영성을 가졌다. 언니가 볼 때 얄미웠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한 주님과의 깊은 말씀 교제가 마침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어 예수의 죽으심을 미리 예비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탁월한 예배의 영성이다.

 

당시 일반적으로 스승의 발치에 앉는 사람은 남성이었고, 그것도 그 다음 스승의 역할을 할 사람이었는데, 마리아라는 여자가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았다는 데서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의 진정한 여제자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3. 마데트리아 다비다의 영성

 

그런데 실제로 성경에서 여제자라고 불린 유일한 여자가 있다. 사도행전 9장에 등장하는 욥바항의 다비다. 그녀에게 붙여진 마데트리아(mathetria), 곧 여제자라는 호칭은 그녀가 바느질을 하며 겉옷과 속옷을 만들어 항구도시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된 여인들을 도운 것이 손과 발만의 섬김이 아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 섬김에 주님의 여제자로 불릴 만큼 주님과의 친밀한 만남에 기초한 예배의 영성이 듬뿍 스며 뜨거운 가슴의 섬김으로 승화되었다는 것.

나는 다비다자매회가 26년 전에 설립되면서 그 이름을 다비다라는 여제자에게서 따왔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하고 ‘다비다 영성’이란 말을 자주 썼다. 홀로된 자를 도와주고 봉사하는 마르다의 영성과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마리아의 영성의 조화를 이루는 영성이라는 의미로 정리해본 다비다자매회의 영적 정체성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가슴으로 바라보는 예배자이자, 스스로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간증하며 홀로된 자를 항상 선행과 구제로 섬기는 봉사자인 다비자자매회의 수많은 마데트리아들을 뜨겁게 응원한다.

 

나 또한 두 영성의 조화를 잃지 않는 마데테스(mathetes) 다비다, 곧 ‘남제자 다비다’로 함께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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