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인연들
김영경
중학생이 되었다. 나는 수업료에 대한 정보에 무지했던 부모님 덕분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자주 어두운 마음으로 학교에 가야만 했다. 수업료를 못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조회, 종례시간이면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선생님이 수업료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가끔은 수업시간에도 교무실에 불려가곤 했다. 수업료를 빨리 내라는 독촉을 받고 교실로 돌아올 때는 수돗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내곤 했다. 교과마다 준비물은 왜 그리 많은지, 나는 시간마다 준비물을 빌리러 이 교실 저 교실 서둘러 다녀야 했다.
비가 와도 우산이 없어 그냥 등교했다. 차비가 없어 모르는 아이에게 꾸기도 했다. 엄마가 김치만 싸주는 것이 부끄러워서 중학교 3년 내내 도시락을 안 가지고 다녔다. 나에게 이 시절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렵고 안타까운 날들이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은수 오빠를 보면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지곤 했다. 골목길에서 오빠가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본 나는 얼른 장독대 뒤에 숨었다. 은수 오빠는 은경 언니와 쌍둥이였다. 맨 처음 이사 왔을 때 은수 오빠가 커다란 솥에서 두 손 가득 찰 만큼 큰 빵을 주었는데 나는 그 크기와 맛에 감동을 받았다.
어느 날 교회에서 ‘하나님께 편지 쓰기’ 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쓴 편지가 가장 잘 썼다고 오빠가 칭찬을 해주어 무척이나 기뻤다.
은경 언니는 미용사가 꿈이었다. 자주 내 머리를 잘라 주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 편집사님은 종일 장사를 하러 가셨는데 신심이 깊고 친절한 분이었다. 은수 오빠 집은 동네 아이들이 언제나 찾아가도 되는 항상 열려있는 집이었다. 자전거 타는 법, 영어 단어를 알려주던 고마운 오빠였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잘생긴 은수 오빠를 짝사랑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도서부원으로 도서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러 종류의 책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책 읽는 시간이 행복했다. 도서부 친구들끼리 특히 친하게 지냈다. 고민도 이야기하고 책도 권하고 서로를 공감해주고 격려해주며 우정을 키워갔다. 작가가 되고 싶단 생각도 했다. 책을 많이 읽은 그 시간이 있었기에 나중에 사회생활을 할 때 큰 힘이 되었다.
여름 방학이 되면 교회에서 ‘소년부 수련회’를 하기 위해 기도원으로 갔다. 좋은 경치와 친구들과의 친밀한 교제, 말씀과 기도는 나를 영적으로 육적으로 성숙하게 하였다. 깨끗한 계곡물로 쌀을 씻어 밥과 국을 끓여서 먹었다. 밤이 되면 목욕도 했다. 3박 4일 일정이 끝나고 집에 올 때면 목이 쉬곤 했다.
겨울, 성탄절 전야는 교회에서 밤을 지새웠다. 각자 선물을 준비해서 뽑기도 하고 여러 프로그램은 좋은 추억이 되었다. 성탄절 새벽, 멀리 이웃 마을까지 돌면서 불렀던 새벽 송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눈이 많이 내린 날의 고요함과 눈 쌓인 산야를 바라보며 느꼈던 아름다움, 길을 걷노라면 마음이 맑아지고 경건함이 생겼다.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겁이 많았다. 토요일 저녁, 소년부 예배 때마다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예배의 사회와 기도를 맡아서 진행했는데 나는 여러 번 순서가 지난 후 겨우 사회도 보고 기도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밤길은 무서웠다. 언제부턴가 아랫집에 사는 신우가 나를 도와주었다. 내가 밭을 지나 우리 집에 들어가면 지켜보다 자기 집에 들어갔다. 고마운 친구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을 했다. 첫 직장으로 ‘노아 패션 주식회사’에 입사했다. 300여 명이 되는 회사원과 방통고를 다닐 수 있는 혜택이 있었다. 기숙사 책임자인 언니가 옥상에 있는 10호실로 안내했다. 꽤 큰 방이었다. 컬러 텔레비전이 있고 20여 명이 함께 생활한다고 했다. 이불과 세면도구를 준비해야 했는데 준비를 안 해 와서 방 식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완성반에서 일했는데 마무리 작업으로 옷이 만들어진 다음 단추 달기, 라벨 달기, 실밥 따기 등을 했다. 점심은 식권을 가지고 식당에서 먹었다.
며칠 후 나는 용산고 부설 방통고에 입학했다. 먼 친척 되는 효원 선생님과 명숙 언니의 도움이 있었다. 교육방송을 듣고 공부하고 한 달에 두 번 일요일에 출석 수업을 해야 했다. 회사 일은 매우 바빴다. 미싱반에서는 8시에 끝나고 모두 나갔다. 완성반은 뒤처리 일이라 퇴근 시간이 밤 12시에 끝나는 일이 많았다.
9시에 방에 가서 교육방송을 듣고 10시에 다시 3층 공장으로 내려와 일했다. 일이 끝나고 방에 들어가면 모두 방을 차지해 어디에서 자야 할지 난감했다. 이불도 없어 망설이는데 반장 언니가 일어나 틈이 나는 자리에 나를 눕게 해 주었다. 옆자리에서 약간 싫은 소리를 했다. 나는 작은 몸을 웅크리고 조용히 울었다. 그냥 슬펐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 그만 자거라.” 말해 주어 겨우 진정하고 잠들 수 있었다.
학교에 갔다. 학생들은 직장인들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자기소개를 하고 직장 이야기도 나누었다. 몇 달이 지난 후 학교 옥정 언니가 미싱사로 있는 가림 패션으로 회사를 옮겼다. 창신동 산꼭대기 낡은 아파트에서 자취를 하게 됐다. 재봉기술을 익히고 싶어 옷 한 벌을 한사람이 만들아 내는 시스템인 이 회사에 오게 되었다. 미싱사인 책임자 언니와 보조 미싱사 2명이 한팀을 이루었다. 생활력이 강한 옥정 언니는 나에게 큰 의지가 되었다.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공부가 더하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학교에 다니는 차희 언니가 가정집을 소개했다.
상도동에 있는 그 집은 단독주택으로 정원이 잘 꾸며진 집이었다. 새로운 문화였다. 모든 집안일을 아줌마에게 배웠다. 가족들은 모두 친절하고 긍정적이고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다. 나는 이곳에서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모범적인 가정 모델이었다. 몇 달 후 주인아저씨 삼촌 댁으로 내 거처를 옮겼다. 큰 아파트였다. 키가 유난히 크시고 얼굴이 신선 같으신 할아버지께서는 처음부터 나를 “아가”라고 부르셨다. 할머니께서는 정이 듬뿍 담긴 미소를 지으며 아름다운 정장을 입으라고 주셨다. 두 분 모두 공부를 많이 하신 지식인이었다.
대학교수였던 할아버지, 초등교사였던 할머니는 사업도 크게 하셨다. 내가 갔을 때는 두 분께서는 부동산을 관리하고 계셨다. 큰 집이라 주로 청소하는데 시간이 갔다. 저녁에 학원에 다니게 해주셨다. 방통고를 졸업하기 전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참 슬펐다. 나는 할아버지가 천국에 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대입에 도전했는데 아쉽게도 실패하였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격려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명지대 사회교육원 피아노과에 입학했다.
피아노 레슨 교수님은 무척이나 엄하고 까다롭고 세심하게 연습시키고 교습을 해주셨다. 같은 교수님에게 레슨 받는 사람끼리 특히 친하게 지냈다. 하루 5시간 이상 강도 높은 연습을 했다. 그래야만 겨우 교수님 마음에 들어 진도가 나갔다. 나는 내 미래를 위해 피아노 연습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절박함을 안고 있었다. 나에겐 재봉기술도 없고 시골집을 돕느라 모아둔 돈도 없었다. 피아노를 열심히 배워 독립하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사회교육원 2년 과정과 졸업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할머니의 든든한 후원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남대문 시장에 가셨다. 예쁜 목도리를 사 주셨는데 이런 소소한 일들이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다.
할머니는 내 인생의 시야를 넓게 해주었다. 고맙고 사랑 많으신 분이었다. 피아노 레슨 교수님도 나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아이”라고 나에게 특별한 신경을 쓰셨다. 상도동 아줌마 내외분도 나를 도와주고 가정의 따뜻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학창 시절에 만났던 친구들, 도움을 준 분들이 있어 나의 청춘은 매우 풍요로웠다.
* <작은나귀> 책을 낸 김영경 자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또 다시 새로운 앞날을 향해 나아가는 계기로 삼고자 서울 ‘강남구립즐거운도서관’에서 개설한 ‘자서전 쓰기’ 수강을 끝내고 자서전을 썼습니다. 지난 회에 이은 두 번째 연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