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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향기 / 임 명 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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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ooner 작성일08-10-04 08:31 조회41,0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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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향기

                                                                                                                            임 명 숙
 
저는 1981년 1월 31일 남편의 권유로 부채로 인한 위장이혼이 사실이혼이 되며 아이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돌보아주던 조카가 가버리면서 아이는 이웃아주머니에게 맡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에게서 무작정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일로 아들과 저는 친정 부모 형제들의 핍박을 받으며 친정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당장 갈 곳이 없어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여러 친구들 집을 찾아다니며 하루 이틀 동냥 잠을 자며 지내다가 출근할 때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바로 회사 근처 미술학원에 보냈고, 회사 경비아저씨가 사시는 지하실 방에서 아주머니와 아이들과 한방에서 잠시 더부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갈 곳이 없는 날을 여관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왔다는 것을 알고 회사에서는 경리담당자로서 위험하다고 생각 되어서인지 그만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청천병력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만난 체험도 구원의 확신도 없었습니다. 친구 어머니의 도움으로 조그맣게 양품점을 하게 되었고, 옆에서 가게를 운영하시는 영락교회 권사님이 시간이 나는 대로 성경을 들고 오셔서 말씀으로 용기를 주시곤 했습니다.
어느 날 권사님이 기도원에 가신다기에 기도원 구경이나 한다며 따라갔습니다. 설교 중에 어머님께 불효했다는 말에 공감이 가면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문제로 어머니 눈에는 늘 눈물이 고여 있었고 나로 인해 커다란 아픔의 응어리를 가슴에 안고 가족들 모르게 쌀이며 반찬 등을 가게로 갔다 주셨습니다.
전도사님의 설교가 끝나자 실컷 울고 싶었습니다. 그때 눈물이 잔뜩 고여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면서 나도 모르게 ‘하나님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는 자식이 되고 싶어요.’ 하는 순간 나의 눈에서는 폭포수와 같은 눈물이 쏟아지면서 목이 터져라 울었습니다.
기도원에 4박 5일을 머물면서 회개와 기도 중에 방언과 많은 영적 체험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께서 굵은 남자의 음성으로 에베소서6:1-4절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집에 도착 하자마자 성경을 펴보았습니다. 이때까지 한 번도 성경을 읽은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을 말씀으로 만났습니다. 허물 많고 죄 많은 저를 찾아주시고 만나주신 기쁨은 세상 어느 것과 비교 할 수 없는 기쁨을 오전시간은 전도하느라 가게는 12시가 넘어서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새벽기도와 모든 공예배를 열심히 드렸으며 유치원 자모의 권유로 1년 과정 네비게이토 성격공부도 교회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신앙이 자라기 시작하여 십일조와 유치부 교사와 구역 권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동대문의류도매상으로 지출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남편과 재결합을 하려고 했지만 제 생각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이 아빠는 재혼을 하게 되었고 양육비 문제가 거론되면서 다시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해만 지면 갈 곳 없는 외톨이로 마음에 방황을 했습니다. 그럴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로 발걸음을 인도 해주셨습니다.
이때부터 새로운 모성이 싹트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 중에 가장 귀한 것 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둥지’라는 단어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동대문의류도매상으로 진출도 하였습니다. 가게가 쉬는 날이면 학교 앞으로 아이를 보러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머리를 긁고 있기에 머리를 보는 순간 저의 호흡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에는 이가 버글거렸고 머리카락 하나에 석케가 4-5개 씩 붙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 머리가 아니라 이가 사는 집이었습니다. 저는 이 광경을 보고와 어미의 자리를 달라며 절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이 아빠를 찾아가 아이를 달라며 난리를 치곤 양육비 청구하지 않는다는 조항의 각서를 써 공증을 해주고는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가 아동학대로 인해오줌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오줌을 질금 질금 쌌고 손톱을 물어뜯어 손톱 밑은 다 헐었습니다. 정신불안인줄 모르고 약사의 말만 듣고 무좀약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32살이 되었어도 아직까지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를 데리고 있어야 하는데 아빠한데 보낸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이가 치유되지 않은 채 사춘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상처로 인해 친구들과 잘 지내다가도 우울해 하면서 혼자서 생각할 것이 많다며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1주일들이 가출을 하였고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운동을 하게 되었고 사춘기의 모든 불만을 푸는 대상은 나였습니다. 이혼으로 인해 아이의 마음속에는 피해의식과 배신감, 부모에 대한 불신감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것들로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도 하면서 어머니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낱마다 성경 잠언서 말씀과 함께 편지를 써서 아이 침대 위에 놓고 가게에 나가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여리고 작전을 해보라기에 아이의 방을 일곱 번씩 돌며 기도 한 적도 있습니다.
아이가 커가면서 시야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제가 감당 할 수 없는 세상 속으로 빠져갔습니다. 물질이 부해지니까 아이는 물질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시편 127:3절 말씀을 붙들고 새벽마다 ‘하나님의 주신 기업이 망해가고 있어요.’하며 호흡이 멎을 것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물질이 아이를 죄악의 길로 가게 한다면 저에게 주신 물질을 다 거두어 가주세요. 물질이 없어도 아이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워지는 것이 저는 더 행복합니다. 하며 울부짖었습니다.
아이는 심한 우울증으로 청소년기를 보냈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원하는 대학에 운동 특기생으로 들어갔고 군대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군대 생활 속에서는 그래도 잘 지내고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 학교복학도 하지 않고 방황은 또 시작 되었습니다.
가게는 힘들어지고 큰 아파트와 몇 개의 가게도 없어지고 저의 생활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9개월씩 방에서 나오지 않고 컴퓨터만하며 나를 거부 했습니다. 편지를 써서 방문 앞에 놓기도 하며 밥상을 들고 방문을 열면 발길로 문을 걷어차기도 하여 밥상을 쏟을 뻔한 적이 수도 없습니다.
아이를 밖에 나오게 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의 부목사님으로 계시던 목사님을 찾아가 교회 아이들을 모아 인라인스케이트를 레슨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께 레슨비를 드리고 아이에게 용돈을 벌게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수 없이 집을 나갔고 돌아 올 때는 카드 빛을 몇 백씩 지곤 했습니다.
그런 끝이 없을 것 같았던 긴 긴 고난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축복하셔서 3년 전에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예쁜 딸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지금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바라보면서 회복된 아들은 제가 운영하던 의류 도매업을 며느리와 함께 운영하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며칠 전 기도 중에 어머니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어머니의 향기는 아름다운 장미꽃 향기도, 청순한 백합꽃 향기도 아닌 모진 비바람을 이겨내고 찬 서리를 맞으며 들에 핀 작은 들국화의 은은한 향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고통일지라도 어머니만은 참고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머니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저는 아이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났고 넓은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저는 남은 삶을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기를 원하며 기도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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