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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1>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부모님/구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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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의목적 작성일13-04-16 21:49 조회40,8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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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1>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부모님

구현모(유서경 자매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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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대째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다. 난 우리나라에서는 발에 차일 정도로 흔한 모태신앙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엄청난 스파르타식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다. 교회성가대의 지휘자이셨던 아버지는 주일학교를 마치고 어른예배 시간에 한창 다른 친구들과 뛰어 놀아야 할 나를 심지어는 제일 앞자리에 데리고 예배를 드리게 하셨다. 그건 어린 나에게 고문 이상의 것이었다. 그 외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십일조의 개념은 이미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배웠으며, 예배시간에 모자를 쓰고 있는 것, 껌을 씹는 것, 그런 적도 없지만 요새 아이들처럼 핸드폰을 꺼내 카톡을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예배의 태도는 아빠가 가장 중요시 하는 부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너무 싫으면서도 아빠가 너무 좋으면서 또 너무 무서웠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버텨냈던 것 같다.

부부 찬양사역자로 활동하신 부모님은 1년에 집(집이라 하기도 뭐한 집.)에 있는 시간이 손에 꼽힐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자기 집처럼 누비고 다니셨다. (특이한건 우리 집은 엄마가 운전을 하셨다.) 중학생이 되기 전 까지는 나도 그 여정에 늘 함께였다. 초등학교 때는 지방에 다니다 결석을 할 때가 많아서 개근상하고는 담을 쌓은 상태였다. 사역의 여정은 결코 화려한 가수의 생활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복음과 찬양이 필요한 곳이면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달려가셨다. 새벽이면 종이 울리고 예배를 드리는 땅 끝 섬마을까지라도. 그렇게 내 초등학생 시절의 기억은 전국 방방곳곳에 펼쳐져있다.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전국에 다니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셀 수 없이 많은 곳을 다니면서 어렸던 내 몸보다도 큰 스피커들을 얼마나 날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키가 더 자라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풉…….

어쨌든 그런 생활의 연속이다 보니 어려운 집안의 경제사정은 나아질 줄 몰랐다. 이런 삶 속에서 나도 내가 신기한 건 강남8학군의 초중고를 나오면서, 또 가끔 잘 사는 아이들한테 무시도 당하면서, 가난한 것 때문에 불평 한 번 하지 않았다는 것. 20대가 되고나서야 내가 나이키 신발 한 번 신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구나 하는 걸 알았다. 20대 후에는 내가 직접 벌어서 살 수 있으니까 그 소원도 별게 아닌 것이 되어버렸고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떼도 한 번 써볼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엄마는 일찍 철이 들어야만 했던 나 때문에 슬프셨다고 말씀하시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죄송하지만, 지금 와서는 엄마와 농담 삼아서 이야기하곤 한다. 그래도 속 썩이지 않은 것이 어디냐고 말이다.

난 20대가 되자마자 호주라는 나라로 떠났다. 이전에는 부모님 없이 어디도 가본 적이 없고, 떠날 때는 그 여정이 그리 긴 여정이 될 것 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빠는 내가 떠나는 날 공항도 나오시지 않고 집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나를 보내셨다. 아빠는 보내기 싫어하셨기 때문이다. 지인도 연고도 없이 떠난 그 곳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고픔, 낯선 환경, 통하지 않는 언어, 지독한 외로움. 이제 갓 십대를 벗어난 내게는 참 벅찬 일들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건 지독한 생존본능 때문인지 뭔지 엄마아빠가 보고 싶어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엄마 밥이 그립다~는 생각도 7년이 다 된 최근 돌아오기 얼마 전에 처음으로 들었다. 좀 아이러니한 경우지만 난 그저 살아남아야겠다는 일념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차마 하지 않을 일들을 다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매일 학교를 나가면서 청소하는 일을 했는데 먼지를 너무 많이 마시다보니 천식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 누우면 호흡을 할 수가 없어 한 달 동안을 거실 소파에 앉아서 자야만 했다. 그 때 어머니랑 통화를 할 때면 눈물을 삼키며 건강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들어간 한국에서 아빠는 구강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기도원에 들어가셨을 아빠가 엄마랑 나 때문에 수술을 받기로 결정하셨고, 수술을 마치고 나오는 것까지만 보고 난 다시 호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기도원으로 갈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어쨌든 수술 그 이후 위독하셨던 아빠를 혼자 간호하며 엄청난 고생을 하신 엄마를 돌아와서 듣고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강하다. 라는 말을 나는 그 때 실감했다. 내가 아플 때 걱정하실까봐 거짓말 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의 일이었다. 아~ 우리 가족은 참 서로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가족이라는 것. 떵떵거리며 펑펑 쓰면서 살지는 못했지만. 오랜 시간 참 많은 귀한 일들을 함께 해왔구나.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겨우 2달 뿐이었던 부자지간의 시간이 한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우리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는 나중에 더 행복하고 더 건강했으면 좋겠다. 내가 잘돼서 멋지고 좋은 일들 더 많이 만들어 드리고 싶다. 아빠가 함께 없어서 아쉽지만 지금 더 좋은 곳에서 엄마와 내가 행복해지기를 함께 기도해 주고계실 거라고 믿는다.

삶은 여전히 힘들고 어떻게 살아가야하나 막막하기만 한 현실이다. 하지만 난 강하다. 뿌리깊이 남겨진 부모님의 스파르타 신앙훈련을 받았으며, 어떠한 상황에도 처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이 뭔지 알고 또 받고 있고, 무엇보다도 가장 든든한 빽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 때문에 난 나의 미래를 기대한다. 엄마! 아빠! 사랑합니다!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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