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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여울목 / 김영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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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9-04-17 12:16 조회20,4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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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여울목

김영경

 

1991년 내 나이 22살 때 뜻하지 않은 질병이 찾아왔다. ‘양극성 정동장애’라는 정신병에 걸린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피아노를 치면 아랫집, 윗집에서 불만을 말하는 소리가 들려 피아노 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방에 방음장치를 했다. 피아노를 치는데 여러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욕 중에도 소리가 계속 들렸다. 연막탄 터진 냄새가 나더니 환풍기에서 연기가 끝없이 나오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 벗은 채로 거실로 나왔다. 거실이 연기로 가득 찼다. 나는 옷을 입고 밖에 나가 할머니를 기다렸다. 공원으로 모시고 가서 조용히 말했다. “할머니!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해요.”

할머니와 함께 한양대 정신과에 갔다. 그 소리, 그 연기, 그 냄새. 모두 나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모두 믿지 않았다.

“과학적으로 생각하세요.” 의사의 말이었다.

나는 더는 자신이 없었다. ‘그토록 성실히 살았는데, 악착같이 살았는데 이 모든 것이 허상이고 환각의 삶이라니?’ 나는 최선의 삶을 살고 모든 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었다. 처녀를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할 수 없다고 할머니께선 말씀하고 한약을 지어 주었다. 여러 곳을 알아본 후 대한기도원에서 요양하게 했다. 한 달이 지난 후 안정을 찾았고 할머니 댁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이 되어 여동생과 같이 자양동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5년간의 남의 집 더부살이를 끝내고 질병과 함께 계획도 없이 나왔다. 자취 생활은 나를 많이 당혹스럽게 했다. 먼저 피아노학원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문정동에 있는 ‘다운 음악학원’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나를 항상 즐겁게 해주었다. 정성 다해 가르치는 나의 강의를 순한 양같이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 환경이 바뀌니 더는 환청이 들리지 않았다. 학원 강의를 하며 지도교수님과는 계속 관계를 이어갔다.

할머니는 “여기까지가 나와의 인연인가 보다.” 하시며 연락을 끊으셨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자취 집은 자양동에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공동화장실이 있고 왼쪽에 문간방을 지나면 주인이 기거하는 안채가 있고 그 옆에 조그만 문간방이 또 하나 더 있었다.

늦은 봄 산비탈을 하얗게 물들이며 무리 지어 피는 조팝나무꽃 같은 사랑을 나는 하게 되었다. 처음 이사 온 날, 나는 지치고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현관문을 들어섰다. 그 사람이 안쪽의 작은방에서 나왔는데 유난히 작은 키에 둥근 얼굴이 잘생긴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D 대학을 나오고 H 통신에 다니고 부모님을 모두 어려서 잃고 누님 손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주인집 아줌마에게 들었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하며 성실하고 진지함을 느꼈다. 나는 이유 없이 그가 너무 좋았다. 손으로 빨래를 하면 내가 대신해주고 싶었고 부엌이 없는 그 사람이 끼니는 제대로 해결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어느 날, 삼계탕을 정성껏 끓여 내가 만든 김치와 같이 그 사람에게 갖다 주었다.

여동생이 나에게 아무에게나 친절을 베풀지 말라고 충고를 했다. 그는 형님이 생수 가게를 한다고 나에게도 생수를 전해주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갔다. 일 년이 지난 후 그가 대출을 받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때까지 나의 무모하고 무조건적인 그 사람 바라기의 알 수 없는 감정은 계속되었다. 나의 질병과 부모님의 장애와 가난, 학력에 대한 자격지심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사랑으로 남게 한 것 같다.

얼마 후 보험 아줌마 소개로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안정을 위한 결혼이었는데 남편의 거짓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음을 시간이 흐른 후 알게 되어 실망감이 컸다. 나는 가난하고 복잡한 힘든 여건 속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각오로 신혼생활을 했다. 첫아이가 태어난 후 빚을 얻어 다운 음악학원을 인수 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네 살 터울로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나는 아이들 육아에 많은 공을 들였다. 남편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여 아이들 양육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나는 아이들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라기를 원해 M 교회 영아부 성가대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서게 하였고 매일 아침 어린이 대공원에 가서 마음껏 뛰어놀게 하였다. 흙을 모르고 자라는 도시의 상황이 안타까워 아이들에게 자연을 느끼며 체험하게 하고 싶었다.

학원 운영도 잘되고 나름대로 성실히 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운이 달리고 환청이 들려오는데 너무도 자연스럽게 찾아와 나는 그것의 이상스러움을 감지 못했다. 아산병원에 입원해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하였다. 의사 선생님은 분열증상이고 과대망상이란 진단을 내렸다. 할머니 집에서 나올 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열심히 생활하는 중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망상이고 환청이었다. 병원 약을 먹으면 몽롱하고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멍했다.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아 주었다. 피아노학원은 문을 닫고 가정집을 얻어 이사했다. 그 와중에 남편은 다른 여자를 만나 빚을 많이 지고 이혼을 요구했다. 나는 여러 가지 부담이 크고 심리적으로 감당이 어려워서 이혼했다.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은 상태로 아이들의 친권자가 되어 양육하게 되었다. 7년간의 결혼생활이 끝이 났다. 3살, 7살의 아이들이 나와 함께 남았다.

얼마 후 병이 호전되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가사 도우미로 일을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내가 일하는 동안 돌봐 줄 데도 필요하고 공부도 많이 시키고 싶어 많은 학원을 보냈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다. 나의 헌신 속에 아이들이 커가고 그와 동시에 나의 어린 시절 못 받은 양육을 아이들에게 하므로 나도 치유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힘든 여건이라 우울증도 심한 시기였다.

나의 30대는 치열한 삶이었다. 아이들에게 이혼으로 인해 따스하고 화목한 가정을 못 보여주어서 항상 미안했다. 나름 최선의 상황을 만들고 싶었는데 나의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가정을 보호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고백한다.

나는 늘 아이들에게 “오늘 많이 사랑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라고 말한다. 나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족하고 감사한 삶이다.

* <작은나귀> 책을 낸 김영경 자매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또 다시 새로운 앞날을 향해 나아가는 계기로 삼고자 서울 ‘강남구립즐거운도서관’에서 개설한 ‘자서전 쓰기’ 수강을 끝내고 자서전을 썼습니다. 이 글은 세 번째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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