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마1:21~23)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들어가는 말
올해를 시작하며 제가 ‘다비다자매회2022’ 10행시를 썼는데 혹 기억하시는지요? 2022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이것을 연말 버전으로 다시 써보았습니다.‘다비다자매회이공이이’로 운을 띄어주세요.
다비다 자매회 2022
다 함께 여는 2022년 새해여서 행복했습니다.
비탄의 상처는 별(星)이 되고 삶의 찬 서리(霜)는 보석이 된
다비다 한 가족, 당신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랑할 건 그분의 십자가뿐이요,
매 걸음마다 손잡고 걸어온 28개 성상(星霜) 속
회복은 늘 섬김을 위한 시작임을 알았습니다.
이제 더 기도하겠습니다.
공허에서 충만으로.
이제 더 사랑하겠습니다.
이생 넘어 영생까지.
시가 어떻게 시작합니까? ‘다 함께!’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함께’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다비다 성탄예배를 드리는 오늘, 세 가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임마누엘이란 이름에 담긴 의미
첫째는 임마누엘이란 이름에 담긴 의미입니다. 본문 마태복음 1장 23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영적 생일로 정한 날이 7월 14일이라서 잘 암송하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히브리어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사야 7장 14절이나 마태복음 1장 23절에서는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는데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는 “이름을 예수라 하라.”니 무슨 엉뚱한 이야기냐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예수’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잖아요.
죄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우리의 죄 문제 해결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임마누엘’과 ‘예수’라는 이름이 가지는 연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한, 즉 ‘임마누엘’하시기 위한 중요한 비밀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라는 것이지요.
이름엔 성품과 속성 또는 하는 일 등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이죠. 영어 이름 ‘스미스’는 ‘대장장이’로서 조상의 직업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하신 일과 그분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예수님이 곧 임마누엘이심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임마누엘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가 강조된 이름이라면, 예수는 그것을 위해 어떤 중요한 일을 하시는가가 강조된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가 본명이라면 임마누엘은 별명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지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는 본명과 별명입니다.
이것은 제가 영적 생일인 1986년 7월 14일에 하나님을 만나고 새로 지은 이름이 ‘소온’인 것보다도 훨씬 뚜렷합니다. 처음에는 ‘온종(穩從)’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생생하게 만나주시던 날 들려주신 여호수아서 14장 8절,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라는 갈렙의 신앙고백에서 따온, “주님을 온전히 좇는다.”는 의미죠. 그러나 이내 ‘온종’이란 이름은 제게 있어 갈렙의 성공보다는 베드로의 실수를 연상케 하는 부담스런(?) 이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온전히 좇기는커녕 작게라도 하나님을 좇는 흉내라도 내자는 뜻에서 슬그머니 ‘소온(小穩)’으로 바꾸었습니다. 뜻도 ‘작은 평온’으로 해석했습니다. 제가 만든 유튜브 채널의 이름이 ‘작은 평안을 주는 채널’입니다. 작은 평안이란 말과 어울리도록 구독 요청도 하지 않고 따로 홍보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소온이라는 이름에서 저를 떠올리기는 솔직히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셨습니까? 마태복음 1장의 탄생에서부터 마지막절인 28장 20절까지 당신이 임마누엘이심을 분명히 하셨던 것입니다.“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2. 임마누엘이 주는 선물
둘째는 임마누엘이 주는 선물입니다. 창세기 39장을 보면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힌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 39:23) 여기에 함께라는 단어가 나오고 형통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서 노예로 생활할 때도, 요셉이 모함을 받아 왕의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으로 요셉의 범사가 형통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형통’의 히브리어가 뭔지 아십니까? 찰라흐인데 그것을 가능케 한 비밀이 하나님의 함께하심이었습니다. 요셉이 30세에 총리가 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렸습니까? 17세 때 형들의 미움을 사서 구덩이에 던져지고부터 13년의 연단을 거치며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이룬 과정, 그것에 형통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진정한 찰라흐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와 함께 하심입니다.
그러기에 찰라흐와 임마누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찰라흐와 임마누엘이 우리 다비다 식구들의 삶 속에 새겨진 두 단어가 되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주시는 찰라흐가 우리 인생 최고의 선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형통이 아니라 우리 삶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지는 형통, 다비다의 찰라흐가 우리에게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함으로써 다비다가 찰라흐하게, 형통하게 했다.”
3. 예배, 임마누엘에 대한 우리의 반응
셋째는 임마누엘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무엇일까요? 예배입니다. 예배의 의미는 임마누엘과 연결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예배야말로 가장 예수의 이름에 맞는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