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라고 생각할 때가 바로 다시 시작할 때(히12:1~2)
1, 들어가면서
이번 다비다 캠프를 통해 다비다가 뿌리 깊은 나무로 잘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땅에 심겨진 작은 씨앗 하나가 주님의 은혜의 단비를 먹으며 든든한 나무로 성장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쉼을 주는 나무로 성장하게 된 것에 놀라움과 감격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회원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여러분, 악보에 있는 쉼표는 잠시 쉬라는 표이지 끝내라는 마침표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쉼을 주신 것은 잠시 쉬며 힘을 충전하여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백창우)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푸른 하늘 열릴 날이 있을 거야
고운 아침 맞을 날이 있을 거야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 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 수 있지
걸어가렴, 어느 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이 울릴 테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인 걸
2. 나의 인생그래프
혹시 여러분들은 길이 끝난 것 같은 자리에 서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우리 다비다 자매님들은 거칠고 모진 바람이 부는 그러한 자리에 홀로 서 보신 분들이라 생각됩니다. 언젠가 다비다 여름 캠프에서 ‘인생그래프’를 그린 적이 있었습니다.
인생그래프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여정 속에서 가장 기뻤던 시간,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언제였는지 인생의 굴곡을 그래프로 그려보는 작업입니다.
검사 결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인생을 굴곡 없이 쉽게 살아온 사람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그래프에 그린 굴곡의 맨 밑바닥, 더 이상 갈 곳 없이 인생이 끝난 것 같은 밑바닥에서 주님을 만난 분들의 그래프가 급상승하는 회복선을 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소망이 없는 인생의 그 밑바닥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다비다에 최근에 나오신 분이나 이번에 처음 나오신 자매님들은 저에 대해 잘 알지 못하셔서, 김 목사는 고생 없이 참 편안하게 살아오신 분 같다는 생각을 하실 것 같습니다만, 저도, 되돌아보면 여러 차례 길의 끝이라고 생각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1) 고된 시집살이, 내 인생의 끝이 보였습니다.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로 인해 연애가 열애가 되어 양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그 사람이 내 인생에 행복을 줄 사람이라 믿고 결혼했는데 남편은 자신의 문제도 해결 못해 전전긍긍하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 잘못했구나! (시집살이, 6남매 가장의 가난, 질병, 우울증) 내 얼굴은 수심이 가득 찬 어두운 얼굴. 내 얼굴에는 “나는 불행해요” 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하여 주님말씀으로 내가 죄인임을 깨달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상황은 변함없으나 평강과 소망을 얻은 나의 얼굴은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혜란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해 하였습니다. 남편만 바라보던 삶이었는데 주님을 만난 후 주님 바라보는 삶으로 다시 시작하여 나 한사람의 변화로 남편과 시할머님이 변하여 주님이 함께하는 복된 가정으로 바뀌었습니다.
2) 남편의 죽음, 삶의 의미도, 꿈도, 비전도 없었습니다.
폐암선고 받은 후 3개월 만에 갑작스런 죽음. 혼자 남게 되리라는 건 꿈도 꾸지 못했는데, 어린 남매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비통함, 두려움, 그리움, 남편 혼자만 떠난 게 아니라 많은 것을 상실한 상실감. 무엇보다 선교의 비전을 함께 공유하며, 꿈을 가졌는데 나 혼자선?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그리고 삶의 의미와 비전의 상실하였습니다.
그 삶의 깊은 골짜기에서 다비다 여제자를 만났습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질문의 답이 ‘다비다자매회’였습니다. 내 인생은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가치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3) 최근 다비다자매회장을 사임할 때, 저는 길의 끝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섭섭하여 눈물지으며 헤어짐을 안타까워하는 자매들이 성대한 은퇴식을 해 주었는데, “어? 이젠 다비다에 나가지 말아야 하나?” 생각되었습니다. 내 몸과 마음, 온 열정과 사랑을 다 불태워버린 다비다.... 사랑하며 끝까지 함께하자고 말했었는데 이제 그 안행의 대열에서 나 홀로 떨어져 나왔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익숙하지 않은 길로 발을 디뎌야 하는 저의 마음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게 서 있었습니다.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자매들과 함께하기로 결정하고 다비다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금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 인생의 끄트머리에 서서 절망하고 낙심하고 계신 분이 있는가요? 길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할 때라는 걸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다시 시작하기
저는 ‘다시 시작’ 이라는 주제의 설교를 부탁받고 많이 고민했습니다. 우리 다비다 회원들이 결승점까지 행복하고 즐거운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 어떤 말씀을 나눠야 할까? 오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히 12:1, 2)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1) 멀리 완주하려면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야
우리는 주님 앞에 설 영광의 그날까지 달려야 하는 믿음의 경주자들입니다. 달리기 경주에 참가하는 선수는 무거운 옷은 달리는 데 방해가 되기에 가벼운 운동복을 착용합니다. 심지어 긴 머리카락도 방해가 된다고 최대한 짧게 자르는 선수까지 있습니다. 그 결승점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가볍게 경주에 임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길을 가로막는 최대의 방해물입니다. 짐 중에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 저는 오늘 믿음의 경주자인 여러분께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얽매이기 쉬운 죄들 가운데 딱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주 쉬운 퀴즈 하나. “OO한다고 OO이 없어지면, OO이 없겠네.”(티베트 속담) 답은 걱정입니다. 이 속담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싱글맘인 저나 여러분이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많이 짓는 죄는 바로 염려, 근심, 걱정하는 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염려, 근심, 걱정이 무슨 죄냐고요?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사람들은 술취함, 방탕한 것은 죄이지만 생활의 염려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생활의 염려를 술 취함과 방탕한 것과 동일한 문제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염려를 죄라고 말하는 이유는 염려는 윤리적인 죄는 아니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영적인 죄이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의심이며 신뢰의 결핍입니다. 이러한 염려는 세상으로 눈을 돌릴 때 일어나는 것으로 성도들에게 신앙생활의 최고의 적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염려하고 계십니까?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저자 미국의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96%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내일의 사건들이거나 신경쓸 일이 아닌 사소한 사건들이며 오직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한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이 4%의 염려 때문에 인생의 기쁨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싱글맘들은 염려가 많은 엄마들입니다. 사춘기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 자녀들의 진로 걱정, 자녀들의 결혼 걱정, 자녀들이 예수 믿지 않아서 걱정, 생활 걱정, 매일 자녀 걱정에 삶이 무겁습니다. 또 나이 들어가며 건강 걱정(코로나, 치매, 암), 노후걱정 등 걱정이 태산입니다. 닥치지도 않은 일에 미리 걱정이 되어 한숨이 먼저 나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셨는데 염려로 인해 기쁨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커다란 바위를 짊어진 것처럼 무겁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 중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처럼 염려는 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염려가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을 들어도 은혜는 잠시일 뿐 다시 염려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염려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염려의 속성은 파리나 모기 같아서 쫓아내도 다시 날아오고 쫓아내도 다시 날아와 잠을 못 자게 괴롭히는 것과 같습니다. 염려는 다리를 묶고 뛰는 것과 같아서 빨리 걸을 수도 없고 넘어지기도 쉽습니다. 그렇다면 이 염려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염려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습니다.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염려의 짐에서 벗어나 평강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에게 “네 염려를 내가 맡아줄 테니 다 맡겨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이하 붙임 파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