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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베드로전서 4:8~11)/이영복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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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3-10-17 15:42 조회25,3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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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베드로전서 4:8~11)

                                                      이영복(다비다자매회 이사장)

□ 오늘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사도들 가운데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실 수 있다고 할 만한 사도를 꼽으라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먼저 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을 들 수 있겠지요.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라고 호칭했으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등 수많은 사랑에 관한 말들을 남겼지요. 또한 사랑장이라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기록한 바울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구구절절 잘 표현했는지 읽을 때마다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사랑에 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도로서 베드로를 꼽고 싶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실패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과의 세 차례에 걸친 사랑 문답은 결국 예수님이 자신을 용서해주시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신 것이란 것을 베드로는 뼛속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8절의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씀은 결코 예사롭지 않습니다. 윤리나 도적의 이야기도 감성 어린 문학적 표현도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형태로 표현했지만, 뜨겁기는커녕 미지근한 사랑도 제대로 못하는 자신의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염두에 둔 자기 고백적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했지만 속마음은 “주님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본문 9~11절의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는 등의 부탁에는 분명 베드로가 홀로된 자를 향해 선행과 구제에 열심이었던 다비다를 생각하는 마음이 근저에 깔려 있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다비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바울의 감동적인 회심장면에 이어 베드로가 중풍병자인 애니아를 낫게 하고 병들어 죽은 다비다를 살리는 기적 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기적은 주님의 기적을 그대로 카피한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 “소녀여 일어나라.”라는 의미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아람어 ’달리다 굼‘의 ’달리다‘(talitha, 소녀)와 ’다비다‘(Tabitha)는 알파벳 하나 차이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다비다는 당시 널리 쓰이던 아람어 이름인데 헬라어로 번역하면 ‘도르가’(작은 양)입니다. 예수님처럼 ‘일어나라’라는 말까지 아람어로 했다면 ‘다비다 굼’이지요. 베드로가 작은 양을 뜻하는 다비다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예수님께서 “내 양을 치라.”는 소명을 주신 요한복음 21장의 사랑문답이 떠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혹자는 다비다가 살아난 것이 선행과 구제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저는 달리 생각하고 싶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들으며 졸다가 3층 창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살리신 것은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그냥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해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공로를 따져서 살려준 것이 아닙니다. 다비다가 살아나는 과정에서 다비다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죽어 있으면 되었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다비다는 죽기 전과 같이 물론 열심히 바느질을 했겠지만 선행과 구제를 삶의 의미로 삼았다기보다는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아 아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갖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 시간 ‘다비다 굼’이라 친히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여러 힘든 병을 앓고 있는 자매들에게 '다비다 굼'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영실아, 일어나라! 공황장애와 우울증에서 벗어날지어다! 어린 딸 화진아, 일어나라! 견디기 힘든 고통과 종양에서 회복될지어다!”

믿음의 본질도 선행과 구제에 있지 않고 은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다비다자매회가 ‘선행과 구제에 열심인 다비다’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다시 살아난 다비다’로 불리기를 소원합니다.

□ 베드로전서의 마지막은 진한 사랑을 표현하라는 권면으로 끝납니다.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라고 했습니다. 입맞춤은 초대교회 당시 성도간의 최고의 형제애를 표현하는 공식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자신의 여러 편지에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할 것을 강조한 반면 베드로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 합니다. 사랑 이상의 거룩이 어디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거룩 대신 사랑이란 단어를 쓴 것은 그 점을 깨달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입맞춤은 예수님과의 입맞춤입니다. 그분과의 입맞춤은 완전한 영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묵상해보면 주님과의 관계에서 입맞춤의 주도권은 그분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의 입으로 나에게 입 맞추게 하소서”라는 아가서 1장 1절이나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입 맞추는 장면이 보여주듯이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께 나아가기 전에 우리에게 먼저 다가와 입 맞추는 분이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일전에 제가 제안한 다비다자매회의 인사법, 곧 ‘옆으로 누운 V자 인사’에 더하여 앞으로는 포옹도 하고 손도 잡아주며 더욱 뜨겁게 사랑을 표현하며 서로 격려하는 다비다 자매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열심이 이루어 내셨고 또 이루어 가실 ‘그분과의 완전한 연합’을 바탕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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