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눅9:23)/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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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7-09-18 17:36 조회21,30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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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눅9:23)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누가복음 9:23)
1. 군대 이야기 하나
여자들에게 제일 재미없는 이야기가 군대 이야기라고 합니다. 용감하게 군대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해보겠습니다. 리액션이 최고 수준이라는 다비다자매님들을 믿고 말입니다. 저는 군종사병으로 군생활을 했습니다. 연대급보다 작은 부대였기에 군목이 없었고 군종사병이 설교를 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회 설교도 했습니다. 주일 아침이면 각 내무반을 돌면서 내무반장에게 사병들이 예배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부탁하러 다녔습니다. 한 번은 수송중대 내무반에 가서 고참병장인 내무반장에게 기독교 신자들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사나운 목소리로 “기독교 환자들 앞으로 나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어디 교회만 간다고 해봐!”라는 협박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평소 교회에 나오던 사병들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 때 딱 한 사람, 새로 전입해온 이등병이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고참병장은 그가 나와 서자마자 군화발로 가슴팍을 차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꾸라지는 이등병을 보며 얼른 그 병장을 막아섰습니다.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병장의 눈을 말없이 쳐다보았습니다. 조금 후 병장은 눈길을 피하더니 어느새 벌떡 일어서 있는 그 이등병을 향해 “너는 진짜구나 교회 갔다 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등병은 제가 제대할 때까지 휴가를 나갔을 때나 작전을 수행할 때를 빼고는 거의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군화발로 한 번 차이고 수송중대에서 진짜 신자라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는 그 고참병장도 더 이상 신자들이 교회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계급도 낮았고 나이도 어렸지만 그가 보여준 그때의 장면은 제게 오늘 본문 말씀인 눅9:23절을 떠올리게 하는 눈물겨운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2. 자기십자가를 진다는 것이란?
그러나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군대에서 교회 가겠다고 하다가 구타를 당하는 것 정도로 설명되는 핍박과 고난에 대한 문학적 비유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극단적인 희생과 노력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소위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행위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 앞에 ‘날마다’라는 단어를 쓴 것은 자기 십자가를 핍박이나 고난으로 해석하는 것을 넘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위, 금식이나 헌금이나 봉사와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주님을 사랑하며 함께 교제하고 동역한다는 자세와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보듯이 자기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부인과 주님 좇는다는 말과 함께 묶여있습니다. 분리하여 해석해서는 곡해하기 쉬운 구절입니다. 자기를 인정해서는 주님을 좇을 수 없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거죠. 본문의 정반대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자기를 인정하고 자기의 왕관을 쓰고 세상을 좇으라.”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말씀의 대척점 있는 말씀으로 저는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야말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하나님을 좇는 것과는 정 반대인 대척점에 있습니다.
이 원죄로부터의 해방은 원래부터 스스로가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행동 자체가 자기부인이 아닌 자신의 정과 욕심에 기초한 인본주의입니다. 결코 자신의 의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그냥 자기가 죽으라는 말입니다. 역설적으로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내가 인생의 주어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3.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실제로 성경은 자기부인의 과정에 하나님의 계획과 열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시간관계 상 신약성경에 나오는 바울과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와 사르밧과부를 통해 자기부인, 자기십자가, 주님을 좇는다는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열왕기상 17장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수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으리라는 말을 아합왕에게 전한 후 그릿시냇가에 가서 숨으라고 했습니다. 까마귀들을 통해 먹이겠다고 했습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는 누가복음 12장 24절 말씀 생각나지요? 그 하나님의 돌봄을 받는 까마귀들이 그릿시냇가에서 엘리야를 먹여주는 장면을 생각하면 저는 전율이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엘리야에게 “나는 내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구나. 힘으로 치면 까마귀만도 못하구나.”라는 자기부인의 시간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릿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시돈땅 사르밧의 이방인 과부를 의지해서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인 선지자가 이방인, 그것도 도움을 줘야 할 과부로부터 도움을 받아야하는 입장에 서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이 자기부인이고 자기가 죽는,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고 순종을 통해 주님을 좇는 시작점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으로 가서 처음 만난 과부의 모습은 나뭇가지를 줍는 모습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한부모가정으로 기초수급 대상. 한 마디로 극빈자의 삶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과부를 만나자 마자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물을 가지러 갈 때에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과부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다며 떡은 없고 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자기와 아들이 떡을 만들어 먹고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부의 말을 듣고 엘리야는 자신을 위해 떡을 먼저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가혹하고 이기적인 요구였지만 과부는 엘리야의 말대로 합니다. 과부에겐 남은 가루와 기름 조금으로 자기와 아들이 떡을 만들어 먹는 것보다 엘리야가 말한 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약속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엘리야에겐 여인의 가난한 형편을 위로하는 것보다 여인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우선순위였습니다.
왕상 17: 15에서 과부는 엘리야가 요구한 대로 했습니다. 그 떡을 아들에게 먼저 주고 싶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죽기로 작정한 마당에 제일 먼저 눈에 밟히는 것이 자식이었을 겁니다. 자기부인의 행동으로 나타난 과부의 믿음은 극단적 상황에서 극단적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를 만난 과부의 축복은 먹고 살 걱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 여인은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날마다의 기적 앞에서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4. 주님과 함께 메는 멍에
눅 9:23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결하여 보아야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 11:28~30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의 십자가와 주님의 멍에에 대한 연결입니다. 저는 이것이 눅9:23에 대한 예수님의 주석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이스라엘에서 멍에는 두 마리 짐승의 어깨에 가로 얹는 나무로서 항상 두 마리가 한 멍에를 지는 것이지요. 멍에를 혼자 지는 것이 아니라 엄마소와 아기소가 멍에를 진 것처럼 주님이 다 하시니까 멍에가 쉽고 가볍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아가서 8장에서 묘사된 그 사랑의 관계, 죽음같이 강한 사랑이고 물과 홍수도 끄지 못하고 사람이 온 재산을 다주고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십자가가 죽음을 의미한다면 주님의 멍에 즉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 멍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이나 자기십자가가 내가 해야 할 의무라면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쉬게 하리라는 말로 나의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우리로서는 주님 지신 십자가, 그 은혜에 자신이 항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는 목표는 결국 나와 같이 멍에를 메어주시는 주님께서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의미를 자신의 삶을 통해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율법의 의라는 관점에서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빌 3:6)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고꾸라집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에게 일어난 중대한 변화는 자기부인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갈2:20)고, 날마다 죽는다(고전15:31)고 했습니다. 주님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빌3:8)고 했습니다. 고후 12장 10절의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는 바울의 고백은 누가복음 9장 23절의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내 멍에는 쉽고”라는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바울이 알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요약컨대, 자기부인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신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것도 주님께서 같이 지며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가 힘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진다는 의미에서 삶의 벼랑 끝에 있는 사람이 자기십자가를 지기 쉽고 하나님의 십자가로의 초대에 응하기 쉽습니다. 영적인 역설입니다. 다비다자매들이 자기십자가를 지기 쉬운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20여 년 간 제게 가르쳐준 다비다의 영성입니다.
5. 맺음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 왜 내가 암에 걸리게 하셨습니까? 왜 남편을 젊었을 때 데려 갔습니까? 왜 말 잘 안 듣는 힘든 아이들을 주셨습니까?" 다비다 여러분, 우리에겐 이해하기 힘든 수많은 “왜?”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주님의 답은 무엇일까요?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요? 아닙니다. 그 답은 언제나 눅9:23. 마 11:28이고 롬8:38~39일 겁니다. 주님은 당신과 함께 멍에를 지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과 끊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진 그 사랑의 멍에를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암도, 가난도,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도, 죽음까지도 말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