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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7인, 사랑과 소명 /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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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0-05-13 11:55 조회17,0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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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의 7인, 사랑과 소명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시몬 베드로,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인 나다나엘, 세베데의 두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같이 가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그들은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요21:2~3)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근심하며 말했습니다. “주여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 떼를 먹여라”(요21: 17)

 

 

바닷가 7인의 리스트

 

‘황야의 7인’이란 서부영화가 있습니다. 1960년대에 처음 상영된 영화였죠. 내로라하는 총잡이와 칼잡이 7인이 모여 악당들로부터 약자들을 도와 한 마을을 구하는 내용이었죠. 당대의 유명배우들이 등장합니다. 율브리너, 스티브맥퀸 등등. 그리고 이를 리메이크한 2016년 영화에는 이병헌도 7인의 한 사람으로 나왔죠.

영화이야기를 꺼낸 건 요한복음 21장에 등장하는 ‘바닷가의 7인’과 대조를 이루며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이나 함께 지냈으나 스승의 죽음 후 오랜만에 다시 그물을 들고 고기를 잡는 그들. 그런데 고기 잡는 데는 전문성이 있는 그들이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배 그물을 오른 편에 던져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153마리나 잡았고, 이어 예수님과 베드로 간의 마치 총싸움보다도 흥미진진한 대화가 이어지죠.

이야기의 도입부분인 요한복음 21장 2~3절에는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제자의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이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부활도 목격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7인의 리스트에는 닭 울음소리와 함께 확인된 세 번의 부인으로 예수님을 볼 면목이 없었을 베드로는 그렇다 치고, 도마도 들어 있습니다. 도마는 누구였나요? 예수님 손의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아야 믿겠다고 했고, 실제로 넣어보기까지 했잖아요? 그러한 내용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도 그 7인에 들어갔고요. 그렇다면 그들이 상상치 못했던 부활의 감격 속에서, 스승이 그토록 말씀하셨던 하나님 나라와 영생의 의미에 대해 서로 나누는 모임을 가졌을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베드로의 물고기 잡으러 간다는 말에 두 말도 않고 합류합니다. 마치 천대 받는 땅 갈릴리에서 하루하루 고기를 잡아 연명하던 본래의 직업으로 돌아간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꼭 제자들의 영성이 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볼 면목이 없는 상황에서 그냥 풀이 죽은 행동으로 보아주고 싶습니다. 스승의 죽음과 부활에 따른 심리적 충격도 있었을 거라는 점에서 자신들에게 익숙한 고향의 일상을 찾아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특히 베드로 편을 든다면, 마가복음 14장 28절의 주님 약속 곧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는 약속을 기억한 측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의 하이라이트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했지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고 신앙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엄청난 비밀이 담겨있다는 것을 제게 가르쳐주었습니다.

우선 베드로의 이름에 대해 조금 나누고 싶습니다.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이잖아요. 유대식 이름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시몬을 만나 게바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게바란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서 `반석'이란 뜻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의 헬라어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의 호칭은 어떠한가요? 베드로도 게바도 아니고 그냥 시몬도 아닙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족보를 중요시하던 유대인들은 누구를 소개할 때 ‘누구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관습이 있지요. 그러나 상대방을 직접 부르면서 ‘누구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흔치 않고 간혹 상대를 존중히 여기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전에도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부른 적이 있었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가 대답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듣고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바요나 시몬아.”라고 불렀었지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와 같은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호칭은 결코 예사롭지 않은 호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베드로에게 뭔가 부담감을 가질 것 같은 베드로 대신 시몬이라 부르며 친구로서의 관계를 확인하는 데 더하여, 인생 최대의 칭찬을 받았던 일을 추억하게 하며 사랑을 재확인하고 새 인생을 시작케 하려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세 번이나 불렀지요.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안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해놓고 왜 그랬느냐?”고 묻지 않으셨죠.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따지지 않으셨고 그런 뉘앙스를 담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은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용서해놓고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하는 절차였던 것이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감히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주님이 아시지 않느냐며 주님의 판단에 맡겼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철저한 자기부인의 자리로 내려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어떤 행위로 정의되는 것이 아님을 베드로는 알았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랑이 행위에 관한 이야기라면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로서는 사랑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었죠.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대화의 과정을 통해 주님이 말씀한 사랑이 주님의 언약에서 비롯된 일방적 사랑이고 사랑은 결국 온전한 연합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또한 베드로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 그것으로 다 된다는 것과 함께 특히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셨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단순한 섬김을 넘어서는 세족식의 본질 즉 십자가를 통한 죄 용서와 대속을 체험케 하는 그 사랑,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이처럼 사랑’의 의미를 알았을 것입니다.

 

내 양을 먹여라

 

베드로와의 사랑문답 끝에 예수님은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내 양을 먹여라”는 것이었죠. 베드로는 그 부탁을 듣고,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신 요한복음 10장의 의미도,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도 깨달았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장래에 대해서도 기꺼이 받아들였을 겁니다.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던 베드로에게 사랑의 회복과 함께 “내 양을 먹여라.”는 소명이 주어집니다. 주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명은 마침내 우리의 일상과 인생 전체를 바꾸지요. 이 소명은 베드로만의 소명이 아니고 저를 포함한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모두의 소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복음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예수님을 배반했던 제자들의 회복으로 끝납니다. 바닷가의 7인 이야기도 끝납니다. 묵상노트를 덮는데 마치 연극의 막이 내린 후 다시 막이 올라 뒷이야기처럼 보여주는 듯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활동을 개시했는데 바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평생 소원이었던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하며 앉은뱅이를 일으킨 그들. 그들에겐 황야의 7인처럼 총과 칼도 없었고 금과 은도 없었지만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외치는 장면을 보고, 저는 황야의 7인이 약자를 돕는 이야기를 뛰어넘는 폭풍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CBS, ‘더 콜링’

 

CBS TV에서는 ‘더 콜링(the calling), 부르심의 소명‘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는데, 특별히 가정의 달을 맞아 김혜란 목사님과 다비다 자매들을 인터뷰하고 영상으로 제작하여 지난 5월 5일 방영했습니다.

저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따라가면서, 소명으로 이어지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고, 최고의 소명은 결국 하나님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다비다자매회 26년의 비밀이 불과 25분의 이야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의 여제자 다비다가 살았던 욥바 항구의 사랑과 소명의 이야기를 다시 써오셨고, 계속 써가실 김혜란 목사님과 다비다자매들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욥바 항구의 10인, 100인, 1,000인’의 이야기가 그분의 은혜 가운데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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