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봄날, 저녁 그리고 아침 / 이영복 장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kim 작성일17-04-26 13:18 조회22,76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영혼의 봄날, 저녁 그리고 아침(아가서2:10∼17)
이영복 장로
1. 주님의 시간 ; 카이로스
다시 봄이 왔네요. 말씀 만 읽어도 힘이 나지요? “영혼의 봄날, 저녁 그리고 아침”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저나 여러분이나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영혼의 화창한 봄을 느낄 수 있기를 사모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인생의 비밀을 아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따라가다 보면 때, 곧 시간에 대한 표현이 어떤 의미를 던져주며 다가옴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겨울이 지났고 봄이 되었고 날이 저물고 저녁이 되고 등등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연애편지를 읽으며 ‘시간’에 대해 잘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도 영생도, 하나님의 임재도 섭리도 곧 시간에 관계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하시니라.”라고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창조했는가와 함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둘째 날이라”의 표현이 등장하지요.
헬라어로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chronos)이고 다른 하나는 카이로스(kairos)이지요. 크로노스의 시간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양적인 시간이며, 카이로스의 시간은 특정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특별히 하나님의 활동이 전개되고 그 분의 계획이 실현되는 질적인 시간을 가리킵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 1장의 시간은 분명 달력의 시간 크로노스가 시작된 시간이지만 한편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교제하는 주님의 특별한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이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함으로써 인간은 복된 '카이로스'가 상실된 채 '크로노스'의 시간에 속박 받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시간이라는 한계가 설정되었고요. 아담은 930세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았지요. 성경에서 가장 장수한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지요. 지금보다는 장수한 것이지만 영원히 사는 것에 비하면 요절한 것이지요.
아가서 2장 10절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으니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는 제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펼쳐주신 카이로스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 그 카이로스의 시간은 아가서 2장 17절의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는 인생의 저녁에서 오히려 절정을 이룰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 이것은 우리에게 일어나서 함께 가자고 프로포즈하신 하나님께 부탁하는 주님의 신부로서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진다는 말은 개인으로 적용하면 고난이나 죽음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여기서 베데르 산은 ‘분리하다’는 뜻으로 연인의 이별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즉 고난 가운데 죽음 가운데 주님의 시간이 이루어지는 언약의 산, 카이로스의 시간을 기다리는 신부의 모습을 말씀 가운데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노루와 어린 사슴은 사랑하는 신부를 찾아 그 산을 힘차게 달리는 주님을 가리키고요.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라는 표현이 아가서 4장 6절에도 나옵니다.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라는 뒷부분이 다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의 아가서 2장 17절의 부탁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몰약산과 유향산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상징합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카이로스의 영적 비밀을 풀어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를 통한 새창조 과정이 지나고 바로 그 다음 구절 아가서 4장 7절에 주님의 신부를 향한 감탄이 이어집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바울은 빌립보서 3:6절에서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온전히 지켜왔다는 율법과 주님의 사랑이 부딪친 것입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만들어 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2. 마이너리티 리포트 ; 눅1504
유명한 미국의 스필버그 감독이 2002년에 만든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까? 톰크루즈가 주인공이었지요. 영화는 2054년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워싱턴 DC는 살인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미리 찾아내어 체포하여 범죄를 예방하는 예방방지 시스템(precrime)을 가동하고 미래의 살인자를 찾기 위해 3명의 예지가를 이용합니다. 3명의 예지가가 예견하는 데 있어 전원 일치하지 않을 경우 2명의 예지를 취하고 하나는 버리는데 그 하나가 마이너리티 리포트입니다. 소수자 보고서라고 번역할 수 있지요. 경우에 따라 소수자가 더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초점을 둔 영화로서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왜냐하면 그 영화를 보기 10여 년 전에 저도 꿈을 통한 예지를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것은 그 영화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마이너리티 리포트였습니다. 영화처럼 살인할 가능성을 예지한 것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예지를 보여준 것이었으니까요.
제가 한국은행 부산지점 대리로 근무하던 1990년 5월 17일, 밤에 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회사원을 대상으로 무역협회가 개설한 ‘무역실무과정’에서 강의를 하면서 고장이 난 마이크와 “그것도 강의라고 하느냐!”라는 수강생의 항의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저는 강의날짜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허황된 꿈을 꾼 것이라 생각하며 출근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무역협회 연수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온 것입니다. 그 날 강의키로 한 교수가 사정이 생겼다며 날짜를 앞당겨 강의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습니다. 간밤의 꿈이 좀 마음에 걸렸지만 꿈자리가 좋지 않아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저녁에 무역협회 강의실로 갔습니다. 그런데 연수 담당자가 마이크를 만지며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도 괜찮았는데...” 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마이크가 고장 난 것이었습니다. 신경이 쓰이는 것은 꿈에서 본 수강생의 항의 장면이었습니다. 세 시간의 강의 도중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다시 강단에 선 저는 교탁 위에 놓인 쪽지 한 장을 발견했습니다.
쪽지를 펼쳐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항의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수강생들이 따로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을 직장인들이기에 모든 강의가 끝난 후 있을 평가 대비 예상문제를 미리 알려주겠다고 한 것에 대한 항의였지요. 메모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평가에 대비한 예상문제를 아는 것보다 알차게 강의를 듣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봅니다. 그러니 미리 예상문제를 알려주는 것은 재고해 주십시오. 성경에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지요?” 바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이야기였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제게 미리 가르쳐준 제 삶의 미래에 관한 예상문제였습니다. 수강생들에게 꿈 이야기 등 제게 일어난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예상문제를 가르쳐주지 않아도 되겠느냐고 양해를 구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대신 최선을 다해 강의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쪽지는 잃어버린 자, 소외된 자를 향한 하나님의 지독한 편애가 어떤지를 피부로 실감케 하며, 친히 하나님께서 생명을 살리는 기쁨의 비밀을 미리 보여준 마이너리티 리포트였습니다.
실제로 그 꿈 이야기는 한 중국 대학생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전도를 했을 때 자신은 무신론자라며 예수님을 단호히 거부하던 그 학생에게 그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자신이 그 잃은 양이라며 갑작스런 변화를 보인 것이었지요.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볼펜을 꺼내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불과 2분여 만에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라며 다음과 같은 시를 완성하였습니다. 그 짧은 시간은 더 이상 시계의 시간이 아니고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습니다.
“주님 내 맘에 오셔서/ 화평과 안녕을 주셨네/ 내 맘 문 활짝 열고서/ 새 생명을 영접했네/ 저 푸른 산봉우리는/ 간증의 시작이요/ 마음 깊은 곳에선/ 주님 음성 감동으로 솟아 오르네/ 나의 삶, 생명이제로부터 영원하리”
3. 동전의 양면 : 기쁨과 사랑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을 찾은 주인의 이야기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곧 주인의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시며 보시기 좋았더라 하신 주님의 기쁨은 선악과 사건 이후 거의 사라지고 맙니다. 그 기쁨을 다시 볼 수 있는 말씀이 누가복음 15장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실한 카이로스 시간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새 창조를 보고 좋아하시는 주인으로서의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 기쁨이 큰 만큼 그 기쁨의 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길고 넓고 큰 지를 보여줍니다. 마치 멀고먼 하늘에서 아무리 숨더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꼭 집어 찾아내고야 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보여주신 눅 15장 4절의 그 사랑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은 우리 존재의 목적이요, 가치이자 삶의 이유입니다. 나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을 기다리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영혼의 봄날을 주셨고 저녁이 될 때 달려 와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아침이 되도록 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누리십시다. 그분을 사랑하고 다비다와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