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눈길 (눅19:1-10) /김혜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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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8-05-10 11:50 조회19,7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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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눈길 (눅19:1-10)
김혜란 목사(다비다자매회 회장)
■ 삭개오를 보시는 주님의 눈길
사람과 사람이 서로 통하는 수단은 대화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길은 수많은 언어를 말해줍니다. 사랑스러운 눈길인지, 무서워 피하고 싶은 눈길인지, 따뜻한 눈길인지, 차가운 눈길인지, 그 눈길이 날 받아주고 있는지, 거부하고 있는 지 등등 그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삭개오가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갔던 이유는 “너는 죄인!”, “사귈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람들의 눈길이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시선을 소화해 내야했던 고독한 삭개오.
그의 눈과 예수님의 눈길이 부딪쳤습니다. 그 순간, 주님의 눈길에는 많은 언어가 담겨있었지만, 그 뜻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 없었습니다. "나는 널 알아, 삭개오야 그동안 얼마나 어려웠니? 곱지 않은 눈길을 너무 많이 받았지? 그러나 이제 내 눈을 봐라. 내가 다 안다. 내가 널 덮어줄게.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머물겠다.”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했던 삭개오는 “나는 너의 친구가 되겠다.”는 예수님의 눈길을 알아차렸습니다.
싱글맘들은 싱글맘이 되는 날부터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의식합니다. 그 눈길 속에는 가슴을 시리게 하는 차가운 시선도 있고, 투명인간처럼 지나치는 무관심의 시선도 있을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위축되어 자신을 별 볼일 없는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며 지내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눈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시선을 읽게 되기를 원합니다.
① 불편한 것이지 불행한 것이 아니다.
“누가 널 불행하다고 해. 너는 다만 불편할 뿐이야!” 그러한 주님의 눈길을 기억하십시다. 내 여건과 환경 때문에 불편할 뿐이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불편을 불행으로 여기면 더 무거운 불행이 됩니다. 삭게오는 주님의 그 눈길을 본 이후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자신은 행복자라는 것입니다.
② 차별이 아니라 차이이다.
세상을 살며 차별을 느낄 수도 있지만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에게 차이를 허락하신 것뿐입니다. 주님은 절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차이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 차이로 인해 우리에게 은혜와 영광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차이’의 가치를 발휘할 때입니다.
③ 위기가 아니라 위로이다
나의 삶이 지금 위기라고 생각할 때, 주님이 바라보는 눈길은 “네가 더 이상 위기 속에 있지 않고 위로 속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위기는 단 한번, 그 후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모든 위기를 위로로 바꾸시는 하나님. 위기는 이제 지나갔고 위로만 남았습니다.
■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바다로 간 소금인형」의 저자인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은 오랫동안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건 대답은 마찬가지로 “네 자신을 바꾸라.”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 자신은, 정작 자신을 바꾸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스스로 몰아붙여 보아도, 힘만 더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더 무기력해지고,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어느 날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길 듣게 됩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니까!” 이때부터 신부님은 마음이 놓이고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 주님의 사랑스러운 눈길을 피하지 말고 부딪쳐 보십시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니까!” 그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우리는 절대로 불행할 수 없습니다. 차별이라 생각하며 그 눈길 속에서 힘들어 했는데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차이일 뿐입니다. 이제 위기는 지나가고 주님의 위로가 남았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