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 /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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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8-12-19 16:13 조회18,8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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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롬 8:28, 8:38~39)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8:28)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8~39)
1. 광야의 보물찾기
출애굽 광야여행은 보물찾기 놀이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찾기 쉬운 보물찾기였습니다. 우리가 초등학교시절 즐겨하던 보물찾기와는 달랐습니다. 날마다 하늘에서 비 같이 내린 만나를 거두는 것이 보물찾기였습니다. 민수기 11장 7~9절, 출애굽기 16장 4절에 나옵니다. 새벽에 내린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은 것을 거두면 되는, 즉 찾기라기보다는 줍기였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 예수그리스도가 보물임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보물찾기였습니다. 출애굽의 광야는 전체가 보물찾기의 공간이었는데 영적으로는 최고의 보물인 예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만나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만나에서 육의 먹을 양식이 아닌 영의 양식이라는 답을 쓸 수 있는 것, 보물찾기는 만나(Manna) 즉 “이것이 무엇인가?(What is it?)”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되고 하늘에서 내린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발견하므로 완성됩니다. 출애굽 광야에 무수히 숨겨주셨던 비밀은 곧 하나님의 함께함을 알고 미리 예표된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물로 주어진 것을 더 이상 보물로 여기지 않았어요. 박한 식물, 즉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식물이라며 불평했지요. 만나에 대한 불평은 결국 만나를 줍는 그들을 무는 불뱀을 출현케 했습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옵니다. 죽음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께 처방을 구합니다. 놋뱀을 만들어 높이 세우고 쳐다보면 살았습니다. 보물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쳐다보아야, 예수님을 쳐다보아야 가질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생명 이상의 보물은 없습니다.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광야의 우물에서 솟아나는 물을 노래하게 됩니다. 놋뱀을 통해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물물아 솟아나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구원을 받은 자에게 터져 나오는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불평하다가 뱀에게 물렸음에도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보물을 찾았느냐고? 찾은 쪽지에 뭐라고 적혀있느냐고?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롬8:28절이고 롬8:38~39절입니다. 그러기에 광야의 보물찾기는 마침내 지고의 선이신 예수 찾기요, 아무 것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2. 욥의 달걀 질문
어릴 적 바로 아래 여동생에게 오빠인 제가 까칠하게 대하면 엄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동생 잘 해줘라. 나중에 시집가면 오빠가 찾아갔을 때 닭 잡아줄 거야.” 그러면 저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달걀도 삶아주나?”고. 저는 삶은 달걀을 참 좋아했습니다. 소금 없이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욥기 6장에 보면 욥이라는 사람이 달걀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자신이 졸지에 당한 고난에 대해 소금이 없이 싱거운 것을 먹고, 달걀 흰자위를 먹는 고통을 비유하면서 하나님께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대들었지요.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욥6:6~9)
소금 없는 싱거운 달걀 흰자위, 사람이 먹기 싫어하는 것까지도 바뀌게 하시며 하나님이 맛을 내신다는 것. 욥의 달걀 질문에 숨겨져 있는 욥의 까닭 모를 고난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마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종결되었다는 점에서 역시 롬8:28절, 롬8:38~39절이 답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다비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것이 답이다’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 다비다자매들은 문제풀이에 강합니다. 인생의 문제풀이지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앞서 광야의 보물찾기와 욥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무엇일까요? 먼저 보물찾기의 답으로 “그건 만나다. 메추라기다.” 그러면 틀린 답입니다. 롬8:28절과 롬8:38~39절입니다. 소금 없는 달걀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맛이 없다.”가 아니라 롬8:28절과 롬8:38~39절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관계된 모든 것이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그냥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사랑은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3. 하나님의 끊을 수 없는 사랑
롬8:28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뜨리기 위해 도전하는 것까지 포함하여 모는 환경을 모든 가치 모든 존재 모든 관계를 선을 이루는 재료로 사용하십니다. 롬8:38~3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은 사도바울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7장 24절의 스스로의 탄식어린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사랑하는 이가 떠났습니까? 사망의 그 엄청난 무게를 실감하셨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이 나옵니다. 아무것도 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리스트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사망입니다. 이 사망은 앞서 8장 35절의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소위 고난의 업그레이드버전입니다. 맨 마지막이 다른 아무 피조물입니다. ‘사망+피조물’ 그 결합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해보라고 리스트를 나열해주신 것은 아닐까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은 리스트에서 빼고 싶습니까? 다시 말해 죽은 남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는 것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남편을 왜 젊은 나이에 데려갔느냐?”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끊어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생명+현재일’, ‘생명+장래일’... 지금의 고통가운데 있는 생명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장래가 더욱 암울한 데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은 혹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요나라는 선지자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언덕 위에 올라서 이스라엘의 원수 니느웨를 하나님이 멸망시키는지 지켜봅니다. 하나님의 이방 사랑에 대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분노를 표하고 나서의 행동이지요.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위해 박넝쿨을 준비합니다. 그것이 만들어준 그늘로 인해 요나는 심히 기뻐합니다. 다음날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하여 박넝쿨을 시들게 합니다. 뜨거운 동풍과 함께 햇볕이 머리에 쬐기 시작할 때 요나는 다시 말합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요. 우리를 화나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서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배양도 아니 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4:10~11)
2) 하나님의 사랑은 끝도 없고 제한도 없습니다. 사랑과 거룩은 은혜라는 동전의 양면입니다.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동전의 액면가는 무한대입니다. 영어로 ‘priceless’. 가치가 ‘0’이 아니라 너무도 커서 값을 매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 이름이 영복입니다. 초등학생 여자 짝꿍은 저를 ‘빵복’이라고 놀렸습니다. 복이 없다는 것이죠. 어릴 적 기분 나쁜 추억으로 기억되다가 제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 짝꿍은 영적 혜안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말을 바꾸면 주 밖에는 빵복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했으니 당시는 영락없는 주님 밖의 빵복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야 비로소 영원히 복된 존재라는 정체성이 살아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랑과 거룩을 동시에 실현케 합니다. 사랑과 거룩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제 여동생이 대학교 입학시험 발표를 보고 돌아와서 “오빠 나랑 화투 치자”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둘이서 화투를 쳐본 적이 없었고 사실 좋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같이 치자고 했습니다. 불합격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에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는데 화투라니?”라고 말하지 않았던 것을 감사합니다. 제 평생 가장 동생을 사랑해준 시간이었고 가장 거룩한 화투놀이였습니다.
저는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라는 찬송을 좋아합니다.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거룩입니까? 사랑 이상의 거룩은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쓴 편지의 마지막에 거룩한 입맞춤이란 표현을 썼고 베드로는 사랑의 입맞춤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저는 사랑의 입맞춤이 거룩의 입맞춤이고 거룩의 입맞춤이 사랑의 입맞춤이라고 봅니다. 둘 다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6절에서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온전히 지켜왔다는 율법과 주님의 사랑이 부딪친 것입니다. 거룩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되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는 아가서 4장 7절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만들어 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뜨거운 사랑 고백인 것입니다.
4. 맺음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
왜 나는 혼자여야 합니까?
왜 나의 남편을 먼저 데려 가셨습니까?
왜 나는 돈 때문에 울어야합니까?
왜 나는 몸이 늘 아픕니까?
왜 내 주변엔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여러분, 우리에겐 이해하기 힘든 수많은 “왜?”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주님의 답은 언제나 롬8:28절이고 롬8:38~39절일 겁니다. 주님과 우리의 사랑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마침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