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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그리고.../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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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9-07-24 12:08 조회17,4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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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그리고...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전도서 8:15)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도서 12:13)”

 

1. 이송내 박사님과 나눈 전도서 이야기

 

지난달 5월 25일, 제가 낸 <숨으로 쓴 연가>의 추천사를 써주신 이송내 박사님을 만났습니다. 미국에서 동생을 만나러 한국에 갑자기 나오신 것입니다. 안 그래도 책 출간 후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차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대화를 하던 중 이 박사님은 성경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히브리어와 구약학 박사답게 성경말씀 나누기를 좋아하시는 분입니다. 이 박사님은 지난 번 한국에 나오셨을 때 욥기 이야기를 통해 깊은 묵상의 은혜를 나눠주셨기에 이번에는 또 무슨 말씀을 하실까 기대가 되었습니다.

 

이송내 박사님은 불쑥 성경에서 가장 고귀한 책이 전도서라는 화두를 던지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읽지 않는 것은 불행이라고 했습니다. 이 박사님의 말씀은 제게 전도서를 다시 묵상해보라는 도전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박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왜 전도서를 가장 고귀하게 생각하시는지 100퍼센트 공감이 갔습니다. 이 박사님은 전도서의 두 개 중요한 구절이 바로 전도서 8장 15절과 12장 13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 두 개의 성경구절을 본문으로 하여 이 박사님께서 대화 중 들려주신 말씀과 이에 더하여 제가 묵상한 내용을 중심으로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2. 두 개의 맥

 

전도서는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한 절에만 '헛되다'라는 말이 5번이나 나옵니다. 전도서 전체로는 40번 가까이 나옵니다. '헛되다'라고 하는 것은 존재 자체가 헛되다는 의미도 있지만 "인생이 하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없어지니 헛되다는 것은 공감이 가지만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의미가 없다니? 그럼 의미 없는 삶을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생이 헛되다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겁니까? 성경이 인생이 헛되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성경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답을 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닙니까?”라는 질문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겁니다.

 

전도서는 첫 문턱에서부터 ‘헛되다’는 말에 걸려 넘어지기 쉽고, 읽을수록 혼돈스럽고 복잡해서 닫아버리기 쉬운 책입니다만, 전도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만 있다면 “진짜구나!”라는 감동에 빠질 수밖에 없는 책입니다.

 

우리가 세상 돌아가는 것이 정말 헛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도 잘되는 것 같지 않고, 선보다 악이 승리할 때가 많다. 현실에 있어 선보다 악이 강하게 보인다.”는 회의에 빠질 때입니다. 이것은 전도서에서도 헛된 것의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일찍이 그리스 곧 헬라 철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분리한 이원론으로써 말입니다. 영은 선하고 육은 불완전하며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의 욕망을 철저히 통제하는 윤리적 금욕주의와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허무적 괘락주의라는, 서로 극단적 사상이 공존하고 충돌하는 상황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쪽의 선택을 강요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현성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그 영향을 받아, 아예 세상을 등지고 사는 지나친 경건주의와 세상 사람보다도 더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세속주의라는 모습으로 양 극단에 서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도 이원론의 입장에서 금욕주의적 현실도피와 쾌락주의적 현실참여 이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이지요. 이원론에서 돌아서지 않고는 기독인들이 예수님이 말씀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전도서가 고귀한 것은 헛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답이 보물처럼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온 사방이 ‘헛됨’으로 둘러싸인 단단한 암반 가운데 금맥처럼 흘러가는 두 개의 맥이 있습니다. 전도서 8장 15절과 12장 13절입니다. 나아가 전도서가 제시하는 답으로서 두 개의 맥은 헬라 철학처럼 이원론적 입장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함께 추구하라는 것을 웅변해준다고 저는 봅니다. 곧 전도서 8장 15절의 ‘금일 행복 중심적 삶’,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여기' 곧 'Here and now'의 삶과 전도서 12장 13절의 ‘하나님 중심적 삶’ 곧 하나님 앞 ‘코람데오’의 삶의 조화로운 추구입니다.

 

전도서 8장 15절은 이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것이 밥 먹고 마시는 평범한 일상 속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전도서에 다섯 군데 더 나오는데 전도서 3장 13절에는 그렇게 즐겁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 8:15 외에 전 2:24, 3:12~13, 3:22, 5:18, 9:7 등도 같은 내용)

 

그런데 전도서는 그런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분리하지 말고 합쳐서 하라고 합니다. 전자를 여러 번 계속하여 말한 후, 후자를 결론처럼 제시하는 데서 저는 그 의도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풀면 이렇습니다.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일하는 것 열심히 하면서 하나님 선물로 생각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라. 하나님 믿어 천국 가는 것만 생각하고 살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즐겁게 살아라.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그렇게 살되 본분을 잊지 말라. 인생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사는 것이다.”

 

 

3. 지금 여기(Here and now)와 하나님 앞(Coram Deo)의 조화

 

1) 함께 연합하라

 

전도서는 양자의 삶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조화롭게 잘 살려면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으로 인생을 즐겨서는 안 되며 건강한 공동체(community)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9~12)

 

‘함께’와 ‘연합’의 가치를 생생하게 잘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성경 한 군데 더 찾아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47절에는 오순절 성령강림 후 초대교회 공동체에 나타난 놀라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날마다 기쁨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머리로 하게 서로 지체가 되는 몸, 곧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교회의 비밀입니다. 성령 안에서 ‘함께’와 ‘연합’의 가치를 이루어 가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신비야말로 다비다자매회 25년을 통해 다비다 가족들이 배운 가장 소중한 비밀이라고 생각합니다.

2) 빵을 물위에 던져라

 

일상 속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전도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선물은 움켜쥐지 않고 나눌수록 풍성해집니다. 전도서는 자신의 것을 던지고 나누는 삶의 가치를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빵(식물)을 물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나 나눠줄지어다.” 전도서 11:1~2절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물위에 던지시고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것입니다.

또한 구제함으로써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33절은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다비다 25년을 설명하는 중요한 비밀입니다.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게 하는 삶(고후 1:4)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3) 하나님의 시간 앞에 겸손하라

 

다음으로 전도서는 하나님의 시간 앞에 겸손할 것을 권면합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1~11)

 

전도서 3장의 ‘때’는 인간의 시간(크로노스)이 아니고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을 의미합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 일들의 배후에 인간이 알 수 없는 절대자의 섭리가 있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처음과 끝을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이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때로가 하나님의 시간일 수 있습니다. 이송내 박사님이 대화 중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큰딸이 어릴 적 서양장기를 두는데 갑자기 쳐다보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아빠 나 사랑해요?” “당연히 사랑하지.” “그런데 왜 때려요?”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때리지” 그랬더니 딸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사랑한다면서 왜 때리는지 이해는 못하지만 아빠는 내 아빠고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어요.”

우리는 “하나님 왜 나 사랑하면서 왜 때려요?”라는 질문을 해왔고 또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을 즐기라.”는 것을 단지 기복신앙으로 오해해서는 고난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사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외부에서 다비다를 방문한 많은 분들이 회원들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밝고 즐거워 보이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베푸신 다비다 25년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아버지 되시고 사랑한다는 것을 믿으며 힘든 하루하루를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비밀을 알게 되었기에 그렇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시간 앞에 겸손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시간 앞에 서 있습니다.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오늘을 즐기고, 영원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영원한 현재를 즐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4. 그분이 하신다

 

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허락합니다. 고생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즐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다만 동산 중앙에 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아름답고 풍성한 에덴동산에서 마음껏 먹고 즐기되 선악과는 먹지 말라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으로 다룬 전도서 8장 15절과 12장 13절의 조화를 이루라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는 그것에 실패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지요.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여자를 유혹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 약속대로 예수님이 오셔서 영적인 에덴동산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전도서가 결론으로 강조한 12장 13절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들을 지키라.”는 말씀은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 삼고 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마16:24) 선악과를 극복하는 것은 쉽게 표현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자기를 부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을 때 가장 존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전지전능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인 양 착각합니다. 오늘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참된 자아는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언제 나타납니까? 선악과를 극복하고 에덴동산을 회복할 때 비로소 나타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일상 속에서 즐기는 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지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를 불러주시고 즐기도록 할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할 것이다.”(롬8:28), 그러기에 명령처럼 보이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는 말씀도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하시겠다는 의지입니다. 모든 것이 선물을 가장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십니다. 지금 이 시간,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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