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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바항의 사랑(행9:36~42) /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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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1-09-22 16:18 조회13,2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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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바항의 사랑(행9:36~42)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1. 나의 인생 좌우명,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

 

지난 8월호 <다비다이야기>에서 제가 쓴 칼럼을 읽어보셨는지요? ‘나의 인생 좌우명’이란 제목의 칼럼이었죠.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을 살자!”는 저의 좌우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이 좌우명을 코로나 시대를 극복하는 처방전으로 삼아야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했지요. 칼럼을 읽은 많은 분들이 야간에 보초를 서는 병사들에게 커피 배달하는 군종사병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칼럼에서 저는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영성의 조화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들리셨던 베다니 마을 두 여자의 영성, 즉 마리아의 묵상주의적인 영성과 마르다의 합리적 활동가 영성의 조화였지요. 제 인생의 좌우명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멋과 낭만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창조’가 제 인생에도 부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 함께, 이웃을 향해 감동을 주는 사랑의 실천으로 설명될 수 있는 두 영성의 조화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었죠.

 

2. 다비다의 영성

 

그러면 마르다와 마리아의 영성의 조화를 이룬 모델이 있을까요? 저는 모델 중 한 사람을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36절에서 찾습니다. 오늘 제가 나누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누구입니까?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며 살았던 욥바항의 여제자 다비다입니다. 제가 ‘다비다 바보’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냥 무턱대고 딸 바보가 “우리 딸이 최고야!”하듯이 “다비다 최고야!”하는 것이 아니고 본문을 묵상하며 얻은 결론입니다. 본문을 따라가면서 다비다의 영성에 대해 자세히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사도행전 9장 36절을 보면 개역성경에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성경은 “언제나 선한 일을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로 번역했습니다. 저는 ‘언제나’라는 단어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선행이 일상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여기서 남을 돕는 일을 하며 일상의 삶을 산 다비다의 영성을 봅니다. 특히 여자로서 주님의 제자라는 호칭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예사롭지 않습니다.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여제자’라는 단어가 다비다에게 붙여진 호칭입니다. 그렇게 주님과 친했던 마르다와 마리아 못지않게 주님과 친밀했던 무언가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다비다는 주님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관심을 가지는 대상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된 자 등 소외된 자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지요. 신명기 10장 19절에서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동시에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는 하신다는 것도 잘 알았다고 봅니다. 마태복음 25장 36~40절을 보십시다. 예수님의 양과 염소 비유에서 왕이 오른편 양에게 한 말입니다. "내가 헐벗을 때 옷을 입혀주었고"라고. 양이 되묻습니다. 38절입니다. "언제 주께서 헐벗으신 것을 보고 우리가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그때 왕의 대답이 40절입니다. "여기 있는 내 형제 중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예레미야 22장 16절을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돕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삶이라는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비다는 주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대상과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실천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다비다가 홀로된 여인들을 위해 옷을 만들어 준 행동을 ‘다비다의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며 행복해하는 여인의 얼굴이 절로 떠오르기에 그렇습니다.

다비다가 만든 겉옷과 속옷은 세상 말로는 ‘노브랜드’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는 ‘다비다브랜드’ 즉, 겉모습에서 드러나고 세련된 아름다운 옷보다는 힘든 이웃을 돕는 깊은 사랑이 스민 옷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게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1장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드신 것이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유에서 유를 만드신 것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범죄 후 부끄러워하는 그들을 위해 지어주신 가죽옷입니다. 저는 천지창조와 더불어 이 또한 멋과 낭만이 있는 하나님의 자상한 사랑이 담긴 창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랑은 그때마다 늘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니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러합니다.

 

3. 죽음보다 강한 것

 

여기서 우리는 그토록 선한 삶을 살던 한 여인이 병이 들고 죽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우리는 혼돈할 때가 있지요? 예수님은 “왜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선하게 산 사람이 병이 들고 이해가 안되는 죽음에 직면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을 줍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9장 37절을 보십시다. 욥바항의 사람들은 죽은 다비다의 몸을 씻어 다락방에 눕혔습니다. 당시의 장례법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바로 무덤으로 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했습니까? 죽은 다비다를 무덤으로 바로 보내지 않고 씻어서 다락방으로 보냈지요. 뭔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죽자 시체를 무덤으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살린 것입니다. 욥바의 과부들이 죽은 다비다를 바로 무덤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죽은 다비다를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다비다의 시신 앞에서 베드로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여 다비다를 살렸습니다만, 저는 어쩌면 그전에 과부들의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먼저 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욥바의 과부들은 “아, 다비다가 보여준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사랑이구나.”라는 것을 확인했기에 이미 다비다가 죽었지만 그냥 보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랑에 반응하는 일련의 행동으로 죽은 다비다를 씻어 다락방에 누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는 제자 베드로를 청한 것이었죠. 그런 점에서 욥바항에서의 기적은 바로 사랑으로 시작된 것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욥바에서 가까운 룻다에 있던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에게로 신속하게 왔습니다. 베드로는 다락방에 올라가 울던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무릎 꿇고 기도하고,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 야이로의 집에 가서 사람들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남기고 다 내보내고 딸아이를 살렸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눅8:51)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달리다쿰!” 곧 “소녀야 일어나라!”는 베드로의 “다비다쿰!”, 곧 “다비다야 일어나라!”로 이어진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비다에게 죽었다가도 살아나는 기적, 곧 새창조로 응답하셨다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은 아직 육체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을 경험하진 못했지만 죽음에 처한 것 같은 절망의 상태에서 다시 일어나, 부활의 의미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생을 주관하는 자는 오직 그분임을 비로소 깨달았고 축 처진 손을 잡아 일으키는 그분을 생생하게 만났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임을 배웠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 우리는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며 가르쳐주신 비밀을 가진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죽음의 상황에서든, 살아서든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4. 욥바항의 사랑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제가 만든 노래를 한 곡 소개하려 합니다. 2019년 1월 다비다 창립 25주년을 맞아 ‘사랑의 보물단지’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공연한 기억이 나는지요? 제가 각본을 쓰고 회원들이 열연하여 호응을 얻었잖아요. 공연을 마치자마자 몇몇 분들이 재미있다며 후속편도 만들어 무대에 올리자고 제안을 해서 그러자고 대답하고 미리 제목만 정해두었습니다. 그 제목이 ‘욥바항의 사랑’입니다. 그러다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아 각본을 쓰기를 미뤄왔는데 이번에 같은 제목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뮤지컬의 기본이 되는 주제곡의 가사를 만들고 곡을 붙인 것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욥바항의 사랑

 

님 떠나신 욥바항구에 뱃고동소리 들릴까 봐

멍한 눈으로 밤 지새우고 새벽 기다립니다.

당신 위해 등불 밝히고 두 손 저어 부르리.

어둔 항구의 깊은 탄식, “돌아 와요 나의 사랑.”

 

밤새 님의 여린 어깨에 이슬이라도 내릴까 봐

한 올 두 올 정담아 지은 겉옷 한 장 덮어요.

당신 위해 울타리 치고 망대 높이 세우리.

외론 항구의 굳은 약속, “함께 가요 나의 사랑.”

 

차가운 님의 얼굴에 생기 다시 돌아올라

차마 무덤에 묻지 못하고 다락에 누입니다.

당신 위해 기도하며 일어나라 외치리.

푸른 항구의 생명 물결, “나의 기쁨 나의 사랑.”

 

1절은 욥바항에서 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세상을 떠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인들의 탄식을, 2절은 그런 홀로된 자를 위해 옷을 지어주며 섬기는 다비다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가는 것이며, 성숙과 고귀함의 가치를 이루도록 보호하고 돕는 것입니다. 3절은 그렇게 선행을 베풀며 살던 다비다가 병들어 죽게 되자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여인들의 심정과 기도가 베드로의 ‘다비다쿰’에 녹아들어 마침내 다시 살아나는 기적, 그리고 그 기적을 통해 욥바항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살아난 기쁨이 넘치는 생명의 물결에 대해 표현했습니다.

한 마디로 다비다와 과부들이 나눈 욥바항의 사랑, 그리고 그 가운데 함께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룬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제가 좌우명을 만들면서 내린 사랑의 정의, 즉 “사랑이 무엇이냐?”,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인 삶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이 사랑이다.”를 오롯이 실천한 다비다의 사랑에,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부어져 만들어진 기적 이야기입니다.

 

5. 나가는 말

 

오늘 본문의 하이라이트는 무엇입니까? 9장 42절입니다. 다비다가 죽었다가 살아난 소식을 온 욥바 사람이 듣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나서 다른 사람이 살아나게 한 것이지요. 우리 다비다자매들의 삶의 이야기도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다비다 한 여인에게 “일어나라.”고 하고 살려냈지만, 그렇게 살아난 다비다는 많은 욥바 사람들을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일어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일으켜 세워라. 이제는 육신의 옷만이 아닌 영적인 옷을 지으라. 속옷, 겉옷이 아닌 찬송의 옷, 희락의 옷을 지어 주라. 너는 ‘다비다쿰’으로 일어났으니 ‘욥바쿰’, ‘싱글맘쿰’을 선포하라.”라고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디 어둡고 절망 가운데 있더라도 오늘 본문 속의 다비다처럼 멋과 낭만이 있는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다비다자매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직장 일을 하든 집안일을 하든 봉사의 일을 하든,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다.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시 살아난 변화된 삶을 통해 주님을 믿게 하는 사명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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