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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 진짜사랑(요 20: 11~18)/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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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8-04-16 16:44 조회20,2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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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 진짜사랑(요 20: 11~18)

이영복 장로(다비다자매회 사무국장)

1. 들어가면서

학창시절에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알프스 산 아래 개울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젊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1년 2년이 그렇게 지나갑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개울가로 나와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누군가를 발견하고 감격어린 눈물을 흘립니다. 개울가로 떠내려 온 연인의 시신이었습니다. 알프스 산에 등산을 갔다가 실종된 연인이었는데 해마다 봄이 되고 날이 더워지면 만년설이 조금씩 녹아내리기에 개울가에서 기다리다보면 사랑하는 이의 시신이라도 거둘 수 있겠다는 애틋한 마음이 평생의 기다림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참 바보 같은 여인이었다고요? 그런데 사랑하는 이의 시신이라도 가져가고 싶어 했던 여인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바로 오늘 본문 요한복음 20장 11~18절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가짜뉴스

막달라 마리아와 관련한 가짜뉴스가 두 개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창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결혼해서 자녀까지 낳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창녀가 가짜뉴스라고요? 실제로 유명한 화가의 그림 가운데 창녀의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이 많습니다. 패션오브크라이스트라는 영화나 지저스크라이스트슈퍼스타라는 뮤지컬에서도 창녀로 묘사했습니다. 죄 많은 창녀라는 설교도 들어봤을 것입니다. 저도 여러 번 그런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녀가 창녀라는 말은 없습니다. 성경은 막달라라는 지역 출신의 마리아가 일곱 귀신 들린 자이고 예수님이 그녀를 고쳐주었다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창녀로 오해 받게 된 것은 591년 교황 그레고리 1세가 '고해성사'에 대해 강론을 하면서 막달라 마리아를 죄 많은 창녀로 단정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죄 많은 여자가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받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성경 왜곡이었지요. 198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레고리 1세의 설교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사도의 위치를 공식적으로 복권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짜뉴스에 대해 정작 막달라 마리아는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율법의 의로는 완전한 자라고 했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진짜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진짜사랑은 그 어떤 가짜뉴스에도 훼손되지 않으며 오해 받음으로 인한 두려움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창녀라는 가짜뉴스보다 더 험한 가짜뉴스가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다는 등 2003년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 속 이야기라든가, 2012년 캐란 킹 교수가 공개한 '예수 아내의 복음서'라는 파피루스 조각이 그렇습니다. 다빈치코드는 전설이나 상상에 근거한, 그야말로 황당한 소설이고, 파피루스 조각은 잉크와 필체 분석 등을 통해 현대에 위조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지요.

이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가장 크게 화를 낼 사람이 있다면 막달라 마리아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난 자신의 증언을 부정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으로 만들어버리고 자신의 예수님과의 사랑을 인간적 사랑으로만 폄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가짜뉴스 진짜사랑’인데 앞서 설명한 가짜뉴스를 지우고도 남을 진짜 사랑, 즉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3.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진짜사랑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 20장 11~12절에 보면, 울고 있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시신에 바를 향유를 준비해간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우는 이유는 사랑하는 분의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울면서 또 몸을 구푸려 무덤 안을 쳐다봅니다.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우는 단계는 이미 지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죽음 때문에 울고, 시신 때문에 우는 존재가 아니라는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15절의 부활하신 예수님의 질문,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는 질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산지기인줄 알고 시신을 옮겼으면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 달라며 “내가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말이 예수님을 얼마나 감동케 했을까요? 12제자 다 필요 없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의 이야기를 계속하기 싶지 않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는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 우는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16절의 “마리아야!”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그곳은 더 이상 죽음의 동산이 아니라 생명이 살아나는 부활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동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저런 이유로 울고 싶을 때가 많을 겁니다. 우리의 울음은 부활의 전주곡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찾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죽음을 생각할 정도의 슬픔에 잠겨 있을 때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말씀은 "마리아야"라는 호칭이었습니다. 이름부터 부를 정도로 친밀한 만남이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와의 인격적인 만남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다. 예수님을 알아보자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만지려 했습니다. 만졌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9절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에서 만진다는 것을 영어로는 ‘touch’가 아닌 ‘hold on to’ 또는 'cling to'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접촉이 아니라 손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을 의미하지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녀의 흥분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에 대해 주목해야 합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올라가면 생생히 만질 수 있다는 말씀으로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훨씬 더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고 또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때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예수님에 대해 더 생생한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할 수 있는 비밀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14:6)그리스도의 영인 성령께서 그런 친밀한 자리로 이끌리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 안에서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면서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날마다 계속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릴 가장 좋은 것,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소명으로 연결됩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소명을 줍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문답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내 양을 치라.”고 부탁을 했지만 막달라 마리아에겐 사랑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부활을 증거하라고 한 것입니다. 소명의 내용도 더 엄청난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18절에서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 하나님께로 올라가실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부활을 전한 증인이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쓰며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로 자신을 호칭한 요한도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하면서는 쑥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땅 끝까지 예수님이 증인이 되라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지상명령을 남기십니다.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비다자매회에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과 함께 각자에게 주신 소명을 확인하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4. 나가면서

다시 알프스의 여인으로 돌아갑시다. 사랑은 시신을 기다리는 데서 오고 완성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영혼의 봄은 예수님의 죽음 곧 시신을 기다리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경험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 알프스의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를 생각하면서 죽음과 사랑의 의미를 생각하며 지은 노래가 있습니다. 그분과의 사랑이 인격적 사귐이 되기를 소원하면서 곡을 쓰고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무덤까지 따라 갈 사랑이 그립고 또 그리워 죽음처럼 강한 사랑을 노래하고 또 하고 싶소. 때론 이렇게 붙어 있어 숨 막히듯 행복하고 때론 저만치 떨어져 있어 한 없이 아쉬워도 언약으로 맺은 사랑의 옷자락 씨실과 날실처럼 당신은 항상 내 편이요 난 언제나 당신 편”

그분은 언제나 우리 편이십니다. 우리 편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그분의 편이 되어 하나가 된 사랑을 하며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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