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 반 마리(눅21:1~4) /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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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2-07-08 10:46 조회9,556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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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참새 반 마리(눅21:1~4)
이영복 장로
1. 들어가는 말
이주은 목사님이 6월 정기모임 순서지를 만들면서 이달 설교 제목을 물었습니다. 제목은‘참새 반 마리’라고 했더니 마침 곁에서 듣고 있던 회원이 치킨이 먹고 싶다고 해서 사무실에서 가까운 치킨 집에서 사와 같이 먹었습니다. 다음 달 정기모임 때는 삼복더위 기간이니 닭 반 마리로 반계탕이라도 준비할까 합니다.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과부가 전 생활비인 두 렙돈을 헌금한 것을 본받으라고 하신 말씀일까요? 문맥상 아닙니다.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의 의미는 오늘 본문 앞의 누가복음 20장 47절과 그 뒤의 누가복음 21장 5~6절을 연결해서 해석해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핵심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앞에서 예수님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을 책망하는 이야기가 나온 후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성전에 바치는 과부로 연결됩니다. 그 뒤에는 그러한 헌금으로 지어지고 유지된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12장 41~44절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앞과 뒤에 나오는 내용도 똑 같습니다.
2. 참새 반 마리가 생활비 전체인 여인
오늘 나눌 말씀의 제목, ‘참새 반 마리’는 과부가 헌금으로 드린 생활비 전체인 두 렙돈에 해당되는 가치를 표현한 것입니다. 렙돈은 그리스 구리돈으로 1/2고드란트(로마 가장 작은 돈, 한 푼, 호리로 번역<마5:26>)에 해당됩니다. 이것은 1/8앗사리온(로마 동전)의 가치이고, 우리가 잘 아는 데나리온(로마은전, 그리스의 드라크마에 해당)의 1/128가치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에 보면 참새 두 마리가 1앗사리온에 팔린다고 했으니 두 렙돈은 참새 반 마리 값입니다. 그런데 과부에겐 그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였고 그것을 헌금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참새를 반을 잘라 팔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 과부는 헌금을 하지 않고 참새를 사려 했더라도 참새구이를 맛볼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은 과부가 전 생활비를 드린, 기껏해야 참새 반 마리 가치의 헌금에 함축된 두 가지 중요한 의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3. 성전(교회)의 진정한 의미
첫째, 오늘 본문에는 과부의 두 렙돈까지 받아서 화려한 성전을 유지하려는 자들을 향한 경고와 함께 예수님께서 진정한 성전의 의미를 알려주시려는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성전은 돈으로 세우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헐고 예수님이 다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2~25절을 보면 바울이 철학의 도시 아테네 아레오바고 광장에 서서 참 신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두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니 손으로 지은 신전 안에 살지 않으시며, 뭔가 부족해서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48절에서 스데반도 순교하기 전에 공회에서 한 설교에서 이사야 66장 1절“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으나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설교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게 하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빌미가 되었던 핵심 메시지 중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진정한 성전과 예배의 의미에 대하여 “어디서 예배할까요?”하고 물은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산(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왔음을 선포했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며 진정한 성전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은 손으로 만든 성전에 자신을 가두지 않으신다. 그러나 진정한 성전 되는 자녀의 심령 속에는 기꺼이 자신을 가두신다.”는 비밀을 아는 자들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는(롬12:5) 교회의 비밀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신 말씀들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막11:17, 마21:13, 눅19:46 등). 성전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성행되었던 장사치들의 거래에 대해 분노하셨고(눅19:46, 마21:12, 막11:15, 요2:15) 그런 성전이 멸망의 대상임을 강조하셨으며, 그런 성전이 무너진다고 예언하셨습니다(눅21:6, 막13:2). 마침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그런 성전을 헐고 새로운 차원의 성전을 지으신 것입니다.
지난 4월 18일, 2년 1개월 만의 코로나19 거리두기 전면 해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였습니다.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귀환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였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하나님이 한국 교회에 가르쳐주신 중요한 교훈입니다. 성전의 의미, 교회의 의미, 예배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 본질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코로나19로 모임을 갖기 힘들던 2020년 11월 정기모임(4개월 만에 모임)에서 제가 나눴던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코로나 시대의 영성 : 격리·치유·사랑”에 대해 나눴습니다. 코로나 기간 중 ‘격치사(격리, 치유, 사랑)’가 되자고 했습니다. 모이는 데 제약이 있는 코로나19라는 상황에서 교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관해 말씀드렸던 겁니다. 1)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등 작은 것에서부터 코로나의 전파 위험으로부터 격리 잘하기, 무엇보다도 격리의 시기를 하나님과의 개인적으로 더 깊이 만나는 시간으로 활용하기 2) 격리에만 머물지 말고 치유로 나아가기, 하나님이 이루실 치유를 꿈꾸며 기도하고 서로를 전화로 문자로 격려하며 힘을 주는 치유자로 살기 3) 치유에 더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온전히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기(영혼의 구원) 등을 강조했습니다.
과연 그리 했나 돌아보면 많이 부족했습니다. 이‘격치사’는 코로나19 이후에도 우리가 계속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4.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린다는 의미
둘째,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드린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생활비 전체를 구제비로 드렸다는 것은 자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 전부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려 할 때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서도 확인됩니다. 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갈2:20). 앞서‘격치사’로 표현한 다비다의 영성에서 더 나아가 다비다 영성의 절정은 그분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지요.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 성령공동체처럼 자기 것이라 생각지 않고 그저 나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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