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5리, 은혜로 10리 /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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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9-04-17 12:20 조회18,7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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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5리, 은혜로 10리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태복음 5:38-41)
1. 소월의 왕십리
김소월 시인의 시를 한 편 소개하고자 한다. 여러분도 잘 아실 ‘왕십리’라는 시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댓새 왓으면 죠치// 여드래 스무 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햇지/ 가도 가도 왕십리(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냐거던/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마자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天安)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저젓서 느러젓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왓으면 죠치/ 구름도 산(山)마루에 걸녀서 운다”(1923년 <신천지>에 발표)
‘왕십리’라는 이름은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면서 궁궐터를 찾던 중에 만난 무학대사가 들려준 답이 한자로 ‘왕십리’, 곧 10리를 더 가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왕십리에서 경복궁까지의 거리는 6.7km 정도다.
그런데 이 시의 키워드는 그냥 왕십리가 아니라 ‘가도 가도 왕십리’다 그것도 비가 내리는 왕십리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듯한 절망감이 묻어나는 시인의 시는 일제 식민지배 하에서 느끼는 비극이 스며있다. 그래도 절망 속에 주저 앉고 싶을 때 소망을 완전히 잃고 싶지는 않은 시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만 왔으면 좋지.”
그런 시인의 마음을 우리 마음의 한 편으로 밀어놓고 오늘 본문을 함께 묵상해보고자 한다.
2. 동해보복법과 산상수훈
오늘 본문 마태복음 5:38~41절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출애굽기 21:24절의 모세 율법에 나오는 말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이라는 함무라비 법전(BC1750년)에도 나오는 소위 ‘탈리오의 법칙’을 의미한다. 동해보복법이다. 왜 해를 받는 만큼 보복하라는 것이 사회법의 중요한 기준이 될까? 사람은 감정이 상하면 더 크게 보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대 맞으면 두 대, 눈 하나를 다치게 하면 눈 두 개 등등.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과잉보복을 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라 악한 자에 맞서지 말고 오히려 더 당하라고 한다.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 빰도 돌려대라.”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도 주라.”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율법보다 더 지키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예수님이 더 어려운 율법을 주러 오신 것인가라는 의문도 들지 않는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을 처음 보는 순간 “이건 구약의 계명이나 율법보다 더 행하기 어렵구나.”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실제 산상수훈의 대상은 제자만 아니고 무리가 포함된다. 훈련 받는 제자에게 요구되는 수준이 아니다. 예수님은 살인의 의미를 미워하는 것으로까지 확대하고 간음의 의미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으로 확대하셨다. 그런 점에서 분명한 것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인생을 더 구속하는 엄격한 율법으로 해석하면 틀린 해석이다. 예수님이 은혜를 선포하고 사랑으로 통치하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
3. 여분의 마일(extra miles)
오늘 본문에는 뺨, 옷, 오리라는 핵심단어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신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다.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이라기보다는 당신 자신의 구속계획을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1) 예수님은 십가가를 지는 재판과정에서 뺨을 맞았다. 매 맞고 모욕 당하고 죽음으로 가는 십자가의 길, 그 시작에서 맞은 뺨이다.(요 18:22) 아가서 5장 13절을 보자.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는 이 말씀은 술람미 여인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신랑에 대해 표현한 말씀으로 수치를 당한 뺨에서 시작된 십자가 복음에 관한 이야기다.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 십자가의 죽음이 이루어 낸 복음이다.
2) 뺨을 맞은 모욕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을 다 내어주기까지의 모욕과 수치로 이어진다. 요한복음 19:23~24절을 보자.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참고 시22:18)
십자가에 달리기 전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은 네 등분하여 나눠 갖고, 속옷은 제비뽑아 가져간다. “너를 고소하여”라는 말이 예수님 자신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참고로 오늘 본문은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주라고 했지만 누가복음 6장 29절에는 겉옷을 달라할 때 속옷까지 주라고 하고 있다. 이방인을 위해 기록된 누가복음 기자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한 배려다.
3) 예수님의 말씀은 5리를 가게 하거든 10리를 동행하라는 말씀에서 절정을 이룬다. 5리, 10리의 ‘리’는 밀리온(milion) 곧 숫자로는 1천 걸음이다. 5리는 로마인이 식민지배 백성인 유대인을 용역으로 부릴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억지로’다. 억지로 사는 자유함을 잃은 인생의 모습이 그려진다. 우리가 교회에 나가고 직분을 맡고, 다비다에 나온 것도 ‘억지로’일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도 그 자체로는 ‘억지로’다. 예수님께서도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 고난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 마가복음 15장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등장한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 (막15:21~22) 지금의 아프리카 리비아에 해당되는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졌다. 얼마의 거리를 지고 갔는지는 모른다. 70kg 정도의 무거운 십자가다. 나는 그 장면을 묵상하다가 시몬을 바라보는 에수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나머지는 내가 지고 가겠다.” 로마인이 식민지 백성인 유대인을 용역으로 부릴 수 있는 5리의 두 배에 해당하는 숫자적인 10리의 개념이 아니다. 다시 말해 무거운 십자가를 운반하는 노동력의 제공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대속의 제물이 되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4. 울지말라, 일어나라
억지로 가는 인생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죽음으로 가는 행진이다. 내가 원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누가복음 7:11~17에 보면 죽은 나인성 과부 아들의 관을 메고 가는 행렬을 멈추는 예수님이 등장한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눅 7:11~17)
예수님은 과부에게 울지 말라 하시고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청년이 일어나 앉아 말을 하자 어머니에게 건네주셨다.
죽음을 포함한 ‘억지로’의 인생을 벗어나는 데는 예수님이 억지로 지시는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셨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가 해답이다. 내가 힘겹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오늘 본문은 예수 믿는 사람이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은혜의 복음에 관한 말씀이다. 곧 새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내가 그러한 길을 가겠다.”는 주님의 사랑을 헤아리게 한다.
“네가 억지로 여기 5리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내가 너의 10리길 남은 길을 가리라.
너는 울지 말고 나와 함께 꿈을 꾸자. 나 예수가 너와 함께한다.“
마음 한 자락에 밀어놓았던 소월의 왕십리를 다시 꺼내보자. 예수님의 ‘십리를 가라’는 말씀은 소월의 왕십리처럼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십리’가 아니다. 예수님 그분이 완성하실 십리다. 그분과 우리가 함께 가는 길이다. 슬픔 많은 우리 인생의 5리에 대해 울지 말라고 위로하시고, 죽은 인생을 살리시는 은혜로 우리 인생의 10리를 완성케 하실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며 사순절을 지나는 나와 여러분이 되길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