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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508 /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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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1-04-07 14:00 조회15,0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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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508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8-10)

 

1. 들어가는 말

 

tvN채널에서 방영된 '응답하라' 시리즈를 기억하십니까? ‘응답하라 1997’, ‘응답하라 1994’, ‘응답하라 1988’ 등등. 해당 연도 무렵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로맨틱 가족 코미디 영화였는데 저도 가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응답하라 1508’입니다. 누가복음 15장 8절을 본문으로 하여 정한 제목인데 실제로 15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거장의 한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에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해가 1508년이었습니다. 4년에 걸쳐 완성된 천장화는 천지창조 등 창세기의 아홉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저도 2010년 유럽출장 때 가서 고개를 들고 보았는데 정말 대작이었습니다.

4년 전인 2017년 3월 다비다 정기모임에서 나누었던 “마이너리티리포트 : 눅1504”라는 제목의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스필버그 감독의 2002년 영화, ‘마이너리티리포트’와 비교하면서, 누가복음 15장 4절의 ‘잃은 양의 비유’가 제게 하나님께서 직접 잃은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비밀을 알려 주셨다는 것을 나눴지요. 하나님의 그 사랑의 지향점이 밖으로 향하지요. 그 후속 비유인 ‘드라크마의 비유’는 제게 하나님께서 직접 만져주시는 ‘내적치유의 비밀’을 깨닫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의 지향점이 내 안으로 향하는 것이지요.

두 비유 모두 하나님께서 저의 소명에 관해 알려주신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소외된 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쳐주며 그런 사역에 동참하라는 것이었죠. 특히 잃은 양의 비유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라는 것을,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는 하나님의 치유에 동참하라는 것이었죠. 제게 있어 그 사역의 대표적인 현장은 전자가 중국이라면 후자는 다비다자매회죠. 하나님은 제게 어떤 여자가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모습을 통해 다비다자매회를 떠올리게 하셨습니다. 김혜란 목사님, 당시는 집사님이 시작한 다비다자매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하나님은 “다비다가 답이다.”라며 정답지를 먼저 보여주시고 누가복음 15장 8절에 대해 제게 응답하라고 하신 겁니다. 이 ‘응답하라 1508’에 꼼짝 못하고 붙잡힌 거죠.

 

누가복음 15장 9절을 보면 잃어버린 은전을 찾은 여인이 친구와 이웃을 불러 모아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헬라어 원문은 친구와 이웃을 복수여성으로 표현합니다. 그 여인이 다른 여성들과 잔치를 벌였다는 의미잖아요. 그렇다면 다비다도 여성들의 잔치인데 내가 낄 자리가 없잖아요. 그때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나는 은전을 잃은 어떤 여자의 자리로까지 갔는데 너는 잔치에 동참하는 것도 못하느냐?”였습니다. 그렇게 저와 다비다자매회의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사장으로 섬겼고 지금은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십시다. 세 가지를 말씀 드릴게요. 첫째는 잃어버린 은전(상실), 둘째는 다시 찾은 은전(회개), 셋째는 은전을 찾은 기쁨입니다.

 

2. 잃어버린 은전(상실)

 

첫째는 잃어버린 은전에 관한 것입니다.

2017년 어느 여름날의 일입니다. 집으로 가는 700번 버스 맨 뒷자리에 양복 상의를 벗어 놓고 앉았는데 한 아주머니가 버스에 올라 바로 옆에 앉으셨습니다. 저는 옆자리에 둔 상의를 들어 무릎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곧 상의를 입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상의 무게가 가벼운 듯해서 주머니를 찾아보니 지갑이 없었습니다. 떠나가는 버스를 뒤좇았으나 야속하게 떠나버리고 낙심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 떠나가는 버스 맨 뒤쪽 창문 밖으로 지갑이 툭 던져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지갑엔 신분증에다 신사임당 두 장을 포함하여 신용카드 몇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상의 주머니를 뒤지며 당황하는 저를 보고 제 옆에 앉으셨던 그 아주머니가 던져주신 것이었죠. 나는 떠나가는 차 뒤쪽을 향해 한참이나 고맙다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제가 잃었던 지갑을 찾는 과정이 오늘 본문과는 좀 다른 것 같아 보이지만 오히려 본문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역설적으로 도움이 될 것 같아 소개했습니다.

 

여러분도 무엇을 잃었다가 찾은 경험이 있을 겁니다. 잃었던 것을 찾은 것은 가치가 더해진 것이 아니고 원상회복인데 어쩌면 그리 기쁜지요. 여러분들이 잃었다가 찾은 것 중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찾지 못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아이들 아빠를 잃은 상실감은 말로 할 수 없지요. 특히 코로나시대에 잃어버린 것은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는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한 마디로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한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드라크마(그리스)는 은전으로, 한 데나리온(로마)과 가치가 같습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가치를 따지자면 노동자가 하루 일하면 얻을 수 있는 거죠. 근데 이야기 속 잃어버린 은전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은전 한 닢을 잃은 것 같지만 그것은 10이라는 온전함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하다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에 대해 남편이 증표로 준 예물(목걸이나 머리띠 형태의 장식)이기에 잃어버리면 소박맞고 버림받을 위험성에 직면하기에 어두운 집에서 불을 켜고 찾는 한 남편의 아내로 설명지요. 그런데 저는 10개 중 하나를 잃었다는 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하여 온전한 참자아의 상실, 곧 자기의 존재와 정체성 전부를 잃어버린 것이라는 관점에서 묵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은전을 잃어버린 것을 하나님의 형상의 퇴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는 묵상을 했습니다. 나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 보자는 거죠. “소명을 잃었다. 사는 이유를 모르겠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 등 내적인 상실감에 답을 주는 비유라는 것이요. 즉 이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의 내적치유를 경험하게 된다는 비밀을 깨달은 거죠. 다비다자매들의 상실에서 회복된 여러 간증들을 들으며 정말 하나님이 치유하셨다는 것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은전의 상실로 과부가 될 수도 있는 위험에 직면한 남편과의 관계의 회복보다, 참자아와 자신의 자리를 찾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 거죠. 우리의 진정한 신랑 되신 주님과의 관계 말입니다.

 

참자아를 잃어버린 또 다른 형태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비뚤어진 자아, 왜곡된 자아입니다. 그 또한 참자아를 잃어버린 것과 다를 바 없지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경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엄마와 남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어디 이상한 곳이 없나요? 앉아 있는데도 손바닥을 펴고 팔을 차려 자세로 하고 있잖아요? 팔걸이가 있어 손을 안쪽으로 두면 팔이 굽을 정도로 꽉 죄는 데도 말입니다. 구부러진 팔은 무엇엔가 억압된 생각 내지 습관의 표현입니다. 저는 이 사진을 아주 의미 있게 봅니다. 저의 어린 시절을 설명하는 거죠. 반듯하고 모범적이고 규율을 철저히 준수하는 착한 아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생긴 건 아니니 제가 지금도 웃으며 보는 사진입니다. 그 후로도 저는 계속 차려 자세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래도 졸업 사진에서는 손을 자연스럽게 하고 찍었더군요. 엄마에게 안긴 동생의 손은 어떻습니까? 자유함이 있잖아요. 엄마 품에 안기면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적용하면 율법이 우리를 얼마든지 부자유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억압되는 거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주님은 그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3. 다시 찾은 은전(회개)

 

둘째는 다시 찾은 은전에 관한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1절, 2절을 봅시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들 가운데 앉아 계신 예수님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에 대해 3절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자신이 왜 죄인들과 함께 있는지를 잃은 양, 드라크마, 탕자 비유로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회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러분 회개라는 단어를 잘 아시지요? 사전을 찾아보면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누가 회개한 사람입니까? 문맥상 은전이 회개한 것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은전이 회개를 한다고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오늘 본문의 회개는 무엇일까요? 내가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어 옳은 방향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주체가 하나님이시지요. 그런 점에서 회개란 회복에 차라리 가깝습니다.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신다는 거죠.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어가며 강조한 것이 무엇일까요? "율법을 잘 지키며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아, 너희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나와 같이 밥을 먹는 이 사람들이 잃어버린 내 아들들이다."라는 거죠.

잃어버린 것, 가장 소중한 그것, 참자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요? 돈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나 화려한 장식으로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의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등불을 들고 집안 먼지를 털며 청소를 해서 본질을 회복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지런히 청소하는 여인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열심히 일한 땀냄새보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누가복음 3장 5절의 굽은 것, 왜곡된 것을 곧게 하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창조의 향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4. 그리고 은전을 찾은 기쁨

 

셋째는 은전을 찾은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여인이 은전 하나를 되찾은 것은 은전의 입장, 곧 우리 각자에게 적용하면 드라크마 열 개라는 온전함으로 표현되는 자신의 정체성, 참자아를 되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내게 베푸신 회개의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말입니다. 잔치 비용이 한 드라크마보다 더 들었을지 모르는데도 큰 잔치를 베푸는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며 온 우주를 뛰어 넘는 기쁨으로 표현하고 있잖아요.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게 되면 우선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을 다비다자매들과 나누기 바랍니다. 다비다자매들이 이런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5장 9절의 “나와 함께 즐기자.” 이것이 다비다자매들 모두가 각자의 심령 깊숙이 하나님의 내적치유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들려주신 음성으로 확인되고, 그 주님의 기쁨으로 서로 기뻐하는 고백으로 터져 나오기를 원합니다.

 

5. 나가는 말

 

코로나19시대에 우리가 잃은 것이 많은데 그중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요? 일상의 회복이 참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더 큰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까요? 그런데도 그것을 찾지 않고 다른 대안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오늘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참자아를 찾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고, 그것이 회개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회복시켜줄 테니 주님께 겸손히 나아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참자아의 상실은 곧 생명을 잃은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드라크마를 잃은 여자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참자아를 찾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그분과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것의 주체도 하나님이시며 회개의 주체, 회복의 주체도 하나님이십니다. 맨 처음 말씀드렸던 700번 버스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실제로 제가 지갑을 버스에 두고 잃어버린 상황에서 한 일은 지갑을 잃은 안타까움, 애통, 속상함 가운데 기껏해야 옷 주머니 여기저기를 더듬는 것뿐이었습니다. 제가 주머니를 뒤지고 당황해했을 때 버스 안에 떨어진 지갑을 찾아 차창 밖으로 던져준 사람은 버스 안의 아주머니 곧 ‘어떤 여자’였습니다.

 

아스팔트 위에서 내가 잃은 지갑을 줍기는 했지만 내가 찾았다고 하기는 쑥스럽잖아요. 실제로 누가 찾아주셨나요? 어떤 여자였지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끈질기고 집요한 사랑의 품으로 우리가 더 나아가 깊숙이 안기기를 원합니다. ‘참된 나’라는 은전을 잃어버렸다면 되찾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다비다의 영성, 내가 받은 위로와 은혜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영성으로 잃어버린 자를 찾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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