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우지 마세요(아가서 8:4) /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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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8-12-19 16:06 조회18,89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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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우지 마세요(아가서 8:4)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1. 가장 아름다운 두 단어
2004년 영국문화원에서 비영어권 나라 102개국 4만명을 대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영어 단어’를 쓰도록 하고 순위를 매겼다고 합니다. Love(사랑)는 4위, Smile(미소)은 3위였습니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라는 ‘미스터선샤인’의 Sunshine(햇빛)도 순위에 들어갔습니다. 13위였습니다. 2위는 Passion(열정)이었습니다. 1위는 무엇이었을까요? Mother(어머니)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게 아름다운 두 개의 영어 단어를 적으라고 하면 뭐라고 적을 것 같습니까? Single Mom(싱글맘)입니다.
이 싱글맘이란 단어에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로 싱글맘은 혼자가 아닙니다. 맘이라서 그렇습니다. 맘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지난 8월 싱글맘 행복캠프에서 인생그래프 그리기를 했는데 한 자매가 남편이 40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도 자신의 인생에 0점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두 딸이 있기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싱글이기에 주님의 신부로서의 영적 깊이를 더 할 수 있는 시간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만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씩씩하고 멋있는 원더우먼 같은 싱글맘이라도 참 야속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전도서 4장 11절입니다.
2. 전도서 4장 11절과 아가서 8장 3절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사실 이 구절은 겉옷이 이불 역할도 하던 당시의 상황(출 22:26~27)을 고려하면 부부 간의 이야기로 한정할 수는 없는 구절이지만 싱글맘들에게 무덤덤하게 들릴 수는 없으리라 봅니다. 2000년 1월 다비다 창립 6주년을 축하하는 시를 한 편 썼습니다. '육겹줄 다비다'라는 시였습니다. 전도서 4장을 묵상할 때 둘이 함께 눕는 것보다는 여러 겹의 줄로 초점을 돌린다는 의도로 육겹줄이란 표현을 했던 것입니다.
육겹줄 다비다
그날 이후 멈춘 줄 알았던 시간들이
모두 다비다자매회에 쌓였군요.
그날 이후 끊어진 줄 알았던 노래들도
모두 다비다자매회에 스몄군요.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다는
기가 막히는 성경구절, 전도서 4장 11절
그날 이후 고개 들기 시작한 야속함도
모두 다비다자매회에 묻혔군요.
삼겹줄, 사겹줄, 오겹줄,
그리고 어느새 육겹줄 속에
결코 끊어질 수 없는 끈끈한 정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넉넉한 이김으로.
그런데 아가서 8장 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 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전도서 4장 11절을 덮을 수 있는 그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 약속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사랑하는 남녀의 포옹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하며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표론적인 의미에서 이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성도(교회)를 사랑으로 돌보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을 예시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게 메시지의 핵심이니까요.
3. 깨우지 마세요
아가서에 나오는 예루살렘 딸 또는 여자들은 단순히 예루살렘에 사는 여성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모를 따지고 세상기준으로 판단하는 인본주의, 영적으로는 율법주의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는 자격이 없어 보이는 술람미 여인을 괴롭히는 역할을 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부탁합니다. 오늘 본문보다 앞서 아가서 5장 8~9절에서 “내 사랑하는 이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 때문에 병이 낫다고 말해주오.”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본주의로는 설명이 되지 않으며, 율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확인되고 깊어지는 것이지요.
이 부탁을 들은 예루살렘 여자들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에게 부탁하느냐?”고 다그쳐 묻습니다. 이를 테면 "예수가 율법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거죠. 그에 대해 술람미 여인은 “내가 신체의 구석구석을 묘사할 정도로 잘 안다. 전체가 사랑스럽다. 나의 사랑이요, 나의 친구다.”라는 관계성으로 대답합니다. 사랑 때문에 병이 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이지요. “너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벧전 3:15)는 바울의 말씀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지요. 여러분은 그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진짜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아가서 8장 4절입니다. 깨우지 말라는 것이죠. 이 말씀은 앞서 아가서 2장 7절, 3장 5절에도 나옵니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내 사랑을)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여기서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는 대상은 누구일까요? 이 부탁이 술람미 여인의 부탁인 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나를 손으로 베게하고 안아주는 사랑하는 이를 깨우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은 결국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자는 신부된 나를 깨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기쁨, 설렘, 평안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로마서 8장의 아무 것도 끊을 수 없는 그런 사랑을 연상케 하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사랑함으로 인해 병이 났다는 그 황홀의 상태에서 깨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지요. 밤 깊도록 동산에서 주와 함께 있고 싶어 했던 막달라마리아의 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4. 주님을 깨운 남자와 보아스 곁에 누운 룻
그런데 “주님 왜 주무십니까?(막 4:35~41)”라며 주님을 깨운 남자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었지요. 광풍이 일고 물결이 부딪혀 배 안에 들어와 가득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이 깨웠습니다. 믿음 있는 제자였으면 그냥 주님 옆에 드러누워 같이 잠을 잤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2)믿음이 없느냐? 이 두 가지는 우리의 중요한 영적 체크리스트입니다.
혹 주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듯하여 나를 사랑해 줄까 적이 염려가 될 때는 발치이불을 들고 보아스에게 다가갔던 룻처럼 그렇게 살며시 주님 곁에 다가가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그분께 맡깁시다.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에서 인생의 땅끝을 생각하며 어느 가을에 썼던 졸시 한 편 소개합니다.
마라도의 가을
섬 주위를 도는
깊섶을 따라 군집한
억새풀 사이에 누워
파란 하늘을 본다.
어느새 발끝에선
들꽃 하나 둘
누워 피기 시작한다.
내 발치이불로 들어온
아름다운 모압여인
루스(Ruth)처럼.
나도 저만치 주님
누우신 자리
발치이불 속으로
들어가 눕고 싶다.
땅 끝은 바다 끝은
온통 그리움이다.
조바심이다.
여러분 거센 파도치는 바다 가운데 있습니까? 땅 끝 같은 절망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그냥 주님 곁에 누웁시다. 그분께서 왼손으로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안아 주실 겁니다. 그럼 누가 깨우는가요? 사랑하는 주님이 원할 때까지는 깨우지 말라는 단서를 붙인 것은 그런 나를 깨울 자는 하나님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분의 시간에 그분이 일어나 나를 깨우고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내 사랑이여 일어나세요. 아름다운 내 사람이여 나와 함께 가요(아가서 2:10)” 주님과의 깊은 사랑에 빠지고 주님의 시간을 따라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