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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영성 : 격리·치유·사랑 l 이영복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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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0-12-16 13:55 조회15,3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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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영성 : 격리·치유·사랑(사49:13-17)

이영복 장로(본회 사무국장)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 잊으셨다 하셨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사 49:13-17)

 

1. 들어가는 말

 

코로나19로 참 힘이 들지요? 지난 7월 모인 후, 8월 여름캠프도 못 모였고, 9월도 건너뛰고 10월에도 야외 가을 나들이로 대신했기에 이 자리에서 모이는 건 넉 달 만입니다. 반갑게 인사 한 번 하시지요? 손을 잡거나 안아 주기는 못하니 옆으로 눕힌 V자 다비다 안행 인사로 하십니다. 오늘은 우리 다비다자매회가 코로나 시대 한 가운데서 자녀를 위해서, 다비다 가족들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코로나 시대의 영성’이란 제목으로 격리· 치유·사랑, 이 세 가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2. 격리

 

첫째는 격리를 잘하되, 기회로 활용하라는 것입니다. 코로나19 시대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가 격리입니다. 강제격리든 자가격리든 스스로 조심하며 집콕하는 격리든, 일종의 고립된 생활을 하는 거죠. 그간 우리 다비다 식구들 중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진자가 없는 걸로 압니다만 확진자와 동선이 같아서 자가 격리를 경험한 분들도 계실 겁니다. 참 힘드셨죠? 또 다른 의미의 확찐자(?)가 되어 살만 찌는 것 같고 일상이 재미없고 괜히 우울해지기까지 하고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무려 40년이나 사실상의 격리를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입니다.

모세의 120년 인생은 셋으로 구분됩니다. 이집트 왕자로서의 40년,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출애굽여정 40년이지요. 그런데 그 인생의 가운데 토막, 가장 강건한 40세부터 40년을 미디안 광야에서 사실상의 격리를 경험한 시기였습니다. 나이 40이 되어 자신에게도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알고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는데도 뜻대로 안 되었어요. 자기 동족을 때리는 이집트 사람을 죽여 모래 속에 묻어버리고 후에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잘못한 사람에게 왜 동족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냐고 말하자, 그 잘못한 사람이 “누가 너를 우리의 통치자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네가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 날 죽일 생각이냐”는 말을 했지요. 모세는 심적으로 충격을 받았고 바로까지 이 사실을 알고 자기를 죽이려고 찾았을 때 도망간 곳이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그 시기에 대한 성경의 기록도 아주 짧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세를 모세 되게 한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모세의 40년은 인생의 1/3을 잠수 탄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그랬고 자신이 같이 지내온 배경으로부터 그랬습니다. 그런데 배경이 된 사람들은 다 잊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모세의 40년 격리기간은 하나님의 시간이었고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준비시키는 꼭 필요한 기회였습니다. 모세가 하고 싶어서 미디안광야 40년 생활을 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몰아간 것입니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만난 십보라와 결혼을 하고 장인의 양을 치는 일상의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평범한 외적활동처럼 보이는 그것이 실은 내면 활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위해 써 가신 일기였습니다. 40년 동안 자기 부인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정체성을 주님 안에서 발견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나이 40세에 시작한 미디안 광야생활을 끝내는 나이가 80세였습니다. 나이 80세가 되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내가 누구관대 나를 부르셨습니까?”라는 모세의 질문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아무쪼록 우리를 갇힌 것 같게 하는 격리가 일상화된 시간 동안 자신의 내면 활동을 높여가는 코로나19시대가 되길 원합니다.

 

3. 치유

 

둘째는 격리의 시간을 자신의 내면 활동을 활발히 하는 기회로 활용하는 데서 치유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부정하다고 하는 것이 있는데 네 가지입니다. 주검, 이방인, 악성피부병(나병), 유출병입니다.(민 5:1-4) 이 부정한 것을 대한 조치는 그냥 격리였습니다. 병자나 여인의 경우 자신을 보호하고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소극적인 보호는 있겠으나 근본적인 치유는 아니었습니다. 멀리하고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부정한 것을 보면 도덕적 부정이 아니고 꼭 죄악으로 연결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구약성경의 기준으로는 유대인이 아닌 우리도 이방민족이니 모두 부정한 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이를 모두 낫게 하고 정결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고(시체에게 나오라고 명하여, 요 11:1-44) 이방인 백부장의 하인을 낫게 하셨으며(마 8:5-13), 나병환자를 고치셨고(마 8:2-4, 눅17:11-19),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댄 열두 해 혈루병을 앓는 여인을 고치셨습니다(막 5:21-39).

하나님은 구약에서 내린 처방인 격리(isolation, 레3:4-6)에서 나아가 치유(healing)라는 새 처방을 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하신 격리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격리의 절정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실 때였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단지 격려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이 이루실 치유를 꿈꾸며 기도하고 서로에게 전화로 카톡으로 격려하며 힘을 주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 되라고 말입니다.

 

4. 사랑

 

셋째는 치유에 더해 사랑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치유가 끝이 아닙니다.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날 때가 이른 걸 아시고 제자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육체의 치유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으로 그들을 이끄셨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치유의 절정, 회복의 절정은 영혼의 구원, 곧 영생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가장 중요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해야 합니다. 그냥 그 사랑에 항복하면 됩니다. 어떤 사랑입니다. 왜 항복할 수밖에 없는 줄 아십니까? 너무 커서 그렇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라는 찬양 아시지요? 그 가사가 양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아도 실은 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한계가 없는 사랑, 깊고 깊은 사랑을 기가 막히게 가슴 먹먹하게 표현해주신 성경구절 두 군데만 소개 하겠습니다.

 

그 하나는 사 49:13-17절입니다. 혹시 아이를 낳은 엄마는 젖 먹는 자식들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잊지 않는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우리를 새겨놓으셨다고 하십니다. “내가 내 손바닥에 새긴 너를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느냐?” 본문 말씀을 잘 보시면 ”네 이름을 새겼다.“고 하지 않고 “너를 새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름은 물론이고 우리의 모습, 처지, 고민, 아픔, 장점, 단점을 포함한 전 인격을 새겼다는 의미입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입니다. 그러니 어찌 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렘31:20절입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리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창자가 들끓는다는 말은 단장(斷腸), 즉 창자가 끊어진다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시가 어떻게 끝납니까?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끝나니” 그 애가 창자입니다.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트롯을 아시지요? 미아리 눈물고개로 시작하는 노래. 특히 2절 가사, “아빠를 기다리다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 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 넘던 그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한국전쟁 중 북으로 납치되어 끌려가던 남편을, 아내가 미아리고개에서 마지막으로 배웅하고 기다리는 심정을 구구절절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한 아픔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한 충성심과 이별한 남편을 향한 애달픈 사랑도 결코 가볍지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1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라는 단장의 한을 치유하고 10년, 100년, 1,000년을 넘어 영생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자식을 징계를 하면서도 창자가 들끓는 사랑, 창자가 고통을 받는 사랑, 집 떠난 탕자 아들을 기다리는 누가복음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이 연상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 손바닥에 우리를 새긴 사랑, 창자가 끓고 끊어지는 듯 한 사랑을, 친히 손바닥에 못 박히시고 창에 허리를 상하시며 실제로 확증하셨습니다.

 

5. 나가는 말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격리를 경험하고 부활을 통해 완전한 치유를 경험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명 또한 주님을 닮은 치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먼저 코로나시대를 지나가면서 사회적 거리두기, 마스크 쓰기 등 작은 것에서부터 코로나의 전파 위험으로부터 격리를 잘 해야 합니다. 더하여 그 격리의 시기를 하나님과의 개인적으로 더 깊이 만나는 시간으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격리에만 머물지 말고 치유로 나아가십시오. 치유에 더해 사랑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애끓는 마음으로 온전히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코로나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소명은 그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다비다의 영성입니다. 그분 사랑에 항복하고 사랑으로 행복한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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