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을 주러 오신 예수님/안석문목사(본회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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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17-03-02 17:08 조회23,31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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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을 주러 오신 예수님(요 5:8∼15)
안석문 목사(아침교회 담임, 본회이사)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주 안에서 잘 되고 진정한 안식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주 안에서 믿는 자가 잘 되고 안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확신한 것을 붙잡고 불확실한 일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38년 동안 질병에 시달리며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다만 몇 개월만 아파도 힘든데, 38년 동안 질병에 시달렸으니 무슨 낙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을 베데스다 연못에 넣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희망하는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십니다.
어째서 병이 걸릴까요? 예수님은 질병과 죄가 연관 있음을 시사하십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절) 물론 모든 질병이 죄로 인해 생기지는 않습니다. 다른 본문의 성경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눈 먼 것이 자신이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요9:3) 맹인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무덤에 있던 나사로는 다시 살아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이 일로 주님 이름이 높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 되었습니까?
바울의 고백처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빌 1:20)”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닙니다. 거룩입니다. 예수님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목적이 뚜렷하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목적이 흔들리니까 모든 것이 우왕좌왕입니다. 목적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목적을 주신 주님과의 관계성이 견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아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일에 힘쓰면 모든 일이 수월해집니다. 우리 생각과 달라도 주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면, 희미했던 길이 차츰차츰 선명하게 드러나 보입니다. 복잡한 일이 단순해지고, 안 될 일도 끝까지 견디어 해낼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일에 제한을 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제한적인 능력을 가신 분이야.”라고 불신하신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나의 믿음 없음을 통회하고 언제든 구하기만 하면 후하게 주시는 주님께 믿음을 더하여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구하며 작은 일부터 감사하면 큰 감사거리가 생겨납니다. 불확실한 것에는 매이지 마십시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대화하는 중에 여인은 물 길으러 온 목적마저 잊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잠깐의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목마름을 채워줄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가져왔던 물동이는 버려둔 채 동네로 들어갑니다. 사람을 피해 뜨거운 대낮에 물 길러 왔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후 이제는 사람들을 만나러 찾아 나섭니다.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대놓고 말하는 증인이 됩니다.(요4:29)
여인이 가졌던 수치는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는 도구가 됩니다. 목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즉 믿는 우리가 확신한 것에 거하는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3∼15)
어떤 분들은 한 번 믿으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떠난 사람도 결국은 다시 돌아온다고 위안 삼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어떻습니까? 자신이 섬기던 교회를 떠나 아직도 배회하고 있는 가나안교인이 100만이 됩니다. 인간이란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믿는 바를 굳게 붙잡지 않으면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확신한 것을 계속 붙잡아야 합니다.(딤후3:14∼15)
배우고 확신한 일에 계속 머물러 살기 위해 주님 알아가는 일, 주의 마음 닮아가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양육의 자리에 머물고, 바쁘다는 이유로 피하거나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확신에 거하려면 무엇보다 예수님을 추구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반응을 가져야 합니다. 죽은 나사로를 보고도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했던 바리새인들도 있었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떠나 주님과 다시는 함께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반응을 놓치면 주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의 기쁨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함께 하지 못하면 은혜의 자리가 부담이 되고, 주님과 주님의 공동체에서 멀어집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주님과 같은 것을 추구하십시오. 확신한 것을 붙잡고 불확실한 것에 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안식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는 곳입니다. 주님은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5:14)”고 하셨습니다. 죄를 다시 범하지 않는 것이 질병 예방의 가장 좋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주신 더 중요한 이유는 거룩하게 사는 것, 주님 닮아 믿음으로 살아내는 인생의 목적이란 확신에 거하여 사는 것임을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죄는 믿는 자가 주 안에서 잘 되고 진정한 안식을 누리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과의 연합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도 하나 되지 못하게 합니다.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작은 죄나 허물이라도 회개하여 풀고, 용서하고 풀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럴 때 공동체는 견고해집니다. 사랑할 때 공동체는 주님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사망에 매여, 죄의 종으로, 질병에 묶여, 사탄의 종으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을 해방하여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오셨습니다. 확신한 것에 거하십시오. 불확실한 것에 매이지 마십시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주 안에서 잘 되고 안식하기를 원하십니다.